김사인 시인님의 시 '공부'를 만납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리를 위로해 주는 특별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사인 시 '공부' 읽기
공부
- 김사인(1956~ , 충북 보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년) 중에서
김사인 시인님은 1956년 충북 보은 출신으로 1981년 「시와 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등이, 편저로는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 등이 있습니다.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지훈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김사인 시인님의 시 '공부'는 2015년 발간된 시인님의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실렸습니다. 시인님 50대 후반 즈음의 시네요.
우리 함께 이 시를 가만히 어루만져 볼까요?
'다 공부지요' / 라고 말하고 나면 / 참 좋습니다
- 김사인 시 '공부' 중에서
사는 게 다 공부라고 합니다. 참말로 공부 아닌 게 어디 있겠는지요. 실패와 슬픔도, 성공과 기쁨마저도 공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불현듯 '어머님 떠나시는 일'을 꺼냅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 남아 배웅하는 일 /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 김사인 시 '공부' 중에서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도 공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작은따옴표 속의 이 구절 좀 보셔요.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주체가 시의 화자가 아니라 '우리 어매'이네요. 공부의 주체가 '시의 화자'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무른 예상을 뒤집는 구절입니다. -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이처럼 다소 평범했던 시의 출발이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로 인해 범상치 않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빵을 부풀게 하는 이스트처럼 천천히 우리의 영혼을 부풀게 하네요.
'어머님 떠나시는 일'에서 여러 과정이 스쳐가네요. 죽음 이전과 후의 '우리 어매'는 어떻게 '마지막 큰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이승에서의 마지막 큰 공부, 그것은 평생 동고동락했던 육신을 벗는 큰 공부이네요.
이승에서의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육신의 죽음에 이른 이에게는 그동안 걸어온 생이 환하게 보이게 될까요? 그 세상사 인연들은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킨 공부였을까요? 마지막 떠나는 시간은 이렇게 생의 참회록을 쓰는 시간일까요?
3.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만해집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 숫기 없는 나는 /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 눈물 핑 돌겠지요만,
- 김사인 시 '공부' 중에서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한없이 겸허해진다고 합니다. '무릎 꿇은 착한 소년'처럼요.
그렇게 말했지만, 마지막 어머니를 배웅하는 시의 화자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 큰 슬픔을 삼키며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라고 한 '착한 소년' 같은 시의 화자가 대견하기만 하네요. 그렇게 이승을 떠나는 어머니도, 그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삼키며 '남아 배웅하는' 자신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죽음이 어머니와 '착한 소년' 사이를 갈라놓지 못할 것입니다. 시의 화자는 육신의 죽음 이후 더 크고 높은 영적인 삶이 이어질 것을 믿고 있습니다.
날이 저무는 일 / 비 오시는 일 / 바람 부는 일 /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김사인 시 '공부' 중에서
이 '공부'는 마음공부일 것입니다. 생로병사로 점철되는 삶의 길에서 끝없이 마음을 씻고 맑히는 공부 말입니다. 영적인 진화를 위한 진정한 공부 말입니다.
시의 화자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나 슬픔일지라도 그것은 삶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며 자연 속의 '나'를 이해하는 '공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좀 견딜 만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이영광 시인님의 시 '사랑의 발명'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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