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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광원

by 빗방울이네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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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광원'을 만납니다. 6행의 짧은 시 속에 쓸쓸함이 한없이 펼쳐집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광원(曠原)' 읽기

 
曠原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흙꽃니는 일은봄의 무연한벌을
輕便鐵道가 노새의맘을먹고지나간다
 
멀리 바다가뵈이는
假停車場도없는 벌판에서
車는머물고
젊은새악시둘이날인다
 

- 1936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백석 시집 「사슴」(백석 지음, 소와다리 출판, 2016년 2판1쇄) 중에서

 

2.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이 시는 백석 시인님이 1936년 발행한 시집 「사슴」의 중간쯤에 실려 있습니다. 전체 33편의 시 중에서 14번째 시입니다.
 
띄어쓰기도, 표기법도 초판본에 실린 그대로입니다. 철자가 시인님 고향 평북 지방의 말 그대로여서 낯설어 보이긴 해도 천천히 읽으면 살갑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그런데요, 꼼꼼하기로 소문난 백석 시인님도 공을 들인 첫 시집에서 교정을 못 보고 지나간 오자(誤字)가 하나 있네요. 마지막 행에서 '젊은새악시'의 '젊'자의 받침이 'ㄹㅁ'이 아니라 'ㅁㄹ'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집의 다른 시 '오금덩이라는곧'에도 '젊은새악시'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받침이 바르게 'ㄹㅁ'으로 되어 있습니다. 활판 인쇄여서 활자를 앉히면서 거꾸로 앉힌 모양입니다. 읽는 재미를 주는 오자네요.
 
이 시의 제목 '曠原(광원)'은 무슨 뜻일까요? 
 
'광(曠)'은 '비다' '공허하다' '넓다' '탁 트이다'의 뜻과 '밝다'의 뜻이 있습니다. 
 
'원(原)'은 '근원' '원래'라는 뜻 말고도 '언덕' '들' '벌판'이라는 뜻이 있고요. 
 
그래서 이 시의 제목 '曠原(광원)'은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로 새깁니다. 우리 눈에 익은 '광야(曠野/廣野)'의 유사어입니다.
 
어떤 시일까요?
 
백석 시인님은 영화촬영감독인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은 기다란 ENG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으러 들에 나왔습니다.
 
흙꽃니는 일은봄의 무연한벌을 / 輕便鐵道가 노새의맘을먹고지나간다

- 백석 시 '曠原' 중에서

 
때는 이른 봄이네요. 장소는 벌판입니다. '무연한'은 '아득하게 넓다'는 뜻입니다. 영상의 배경은 아득하게 넓은 벌판입니다. 그것도 흙먼지가 휘날리는 황량한 벌판이네요.  
 
그때 시인님의 카메라 앵글 속으로 경편철도가 등장합니다. 경편철도는 차량이 작고 궤도가 좁은 철도, 경철입니다. 기차를 철도로 환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경편철도는 요즘의 경전철이랄까요? 
 
여기서 멋진 시 구절 하나가 등장합니다. '노새의맘을먹고지나간다'. 노새의 마음을 먹고 지나간다는데 그만큼 천천히 간다는 말입니다. 작은 기차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저도 모르게 쿡 웃음 짓다가 까닭 모를 쓸쓸함과 어떤 무력함이 몸의 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만물이 약동해야 할 이른 봄인데 백석 시인님의 카메라에 들어온 들판에는 황량함과 처연함이 가득합니다. 무슨 일일까요?
 

"젊은 새악시" - 백석 시 '광원' 중에서.

 

 

3. '젊은 새악시 둘이 날인다'

 
멀리 바다가뵈이는 / 假停車場도없는 벌판에서 / 車는머물고 / 젊은새악시둘이날인다

- 백석시 '曠原' 중에서

 
시인님의 카메라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바다를 우리에게 보여주네요. 다시 벌판으로 돌아온 카메라 앵글은 노새의 마음을 먹고 느릿느릿 지나는 그 기차를 보여줍니다. 이 벌판에는 기차역도 없고 임시정거장도 없습니다. 참으로 황량한 곳이네요. 그런 쓸쓸한 벌판에 그 작은 기차가 섰네요. 
 
카메라에 잡힌 기차에서 아,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리고 있네요. 이로써 영상은, 시는 끝이 났습니다.
 
시인님! 왜 새악시가 거기 내렸습니까? 허허벌판에요. 정거장도 아닌 곳에, 임시정거장도 없는 곳에서요.  
 
그러나 백석 시인님의 카메라는 더 이상 들판을 보여주지 않고 새악시를, 새악시들의 표정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새악시 두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어디로 가는 걸까? 연약한 여인들이 인가도 없을 것 같은 황량한 벌판에는 왜 내렸을까?
 
그렇게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분명 한 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 황량한 벌판에 내린 새악시들은 자의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임시정거장도 없는 곳에, 흙바람 날리는 허허벌판에 필연적으로 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요. 
 
이 때는 일제강점기입니다. '젊은 새악시 둘'이 왜 거기에 내려야만했던가에 대해서는 시를 통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슬픈 사연은 누구에게도 캐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흙바람 날리는 허허벌판, 임시정거장도 아닌 곳에 내린 연약한 '젊은 새악시 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요. 그것은 희망과 환희의 시간이 아니라 기구하여 슬픈 운명일 것 같다는 것을요.
 
다시 페이지의 위쪽으로 가 이 시의 제목 '曠原(광원)'을 봅니다.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
 
새악시 둘은 지금 흙바람 날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의 '曠原(광원)' 속으로 한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기차를 내린 그 여린 가슴들은 얼마나 새처럼 떨고 있었겠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주막'을 만나보세요.

 

백석 시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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