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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유치환 시 저녁놀

by 빗방울이네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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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님의 시 '저녁놀'을 만납니다. 춥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저녁놀' 읽기

 
저녁놀
 
- 유치환(1908~1967, 통영)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 「유치환 시선」(유치환 지음, 배호남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2.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유치환 시인님의 시 '저녁놀'은 1954년 발간된 시인님의 제7시집 「청마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이 때는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시기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힘 없고 가난한 농촌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했겠지요.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던 시기, 식량사정이 가장 어려운 보릿고개를 견뎌야했던 시절의 풍경입니다.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 유치환 시 '저녁놀' 중에서

 
굶주림과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 배는 고픈데 저녁놀은 곱기만 하다고 합니다. 이 서글픈 대조는 우리의 숨소리마저 죽이게 하네요. 아름다움 속에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아름다움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가리고 있는지요. 하늘을 향한 불그레한 서러움이 가슴 가득 피어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 어린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 유치환 시 '저녁놀' 중에서

 
저녁밥을 짓는 무렵이면 부엌을 중심으로 온 집안이 부산해야 정상입니다. 하루의 노동에서 돌아와 저녁식탁을 마련하는 시간은 휴식과 평화의 시간입니다. 몸을 씻고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활기가 넘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저녁밥을 짓지 않으니 집집이 어디로 볼일 보러 '가신 듯이' 비어있는 느낌입니다. 저녁 때인데도 굴뚝에 연기가 안 올라오니까요. 식량이 떨어져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은 힘없는 아이와 노인을 먼저 쓰러뜨리네요. 온몸에 맥이 빠져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잠이 들면 배고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까요.
 
저녁밥을 짓지 않으니 딱히 다른 할 일이 없겠습니다. 시 속의 '쉰네'는 어느 댁 할머니일까요? '참 고운 놀을 본다'라고 하네요. 할머니 속이 타오르고 설움이 울컥 쏟아졌을 것만 같습니다. 
 

"소리없는백성"-유치환시'저녁놀'중에서.
"소리없는 백성" - 유치환 시 '저녁놀' 중에서.

 

 

3. '원도 사또도 대감도 ··· 거들어져 있어'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 거들어져 있어 -

- 유치환 시 '저녁놀' 중에서


'원(員)'은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그 당시 가난한 농민들을 핍박하던 원이나 사또나 대감 같은 벼슬아치들이 많았습니다.
 
이 시가 나온 1954년 즈음에도 그런 지도자들이 '없잖아' 있다고 하네요. 없는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던 탐관오리 같은 지도자들이 '거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권에만 골몰하는 지도자들 말입니다. 시는 이렇게 아픈 풍경을 증언하고 있네요. 지금의 우리 풍경은 훗날 어떻게 전해질까요?
 
하늘의 선물처럼 /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 유치환 시 '저녁놀' 중에서

 
'소리 없는 백성'. 굶주림에 지쳐 아무 힘이 없는 백성들입니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해 버렸을까요?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과 '소리 없는 백성'의 대조 속에서 굶주림의 고통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네요.
 
- 밥 먹었니? 식사하셨습니까? 진지 드셨는지요?
 
이런 우리의 인사말을 거꾸로 더듬어가면 이 '소리없는 백성'을 만날 것만 같습니다. 밥 먹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요. 사는 일이란 바로 매끼 밥 먹는 일이겠습니다.
 
이런 마당에 시인님은 왜 '저녁놀'을 '하늘의 선물' 같다고 했을까요? '화안히' 고운 저녁놀이 비극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배는 채워주지 못해도 때로는 그 서러움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기 때문일까요? 
 
이 시 속에 등장하는 1950년대의 풍경 속에 이 시대의 풍경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풍족해진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가난으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거리에서 리어카를 끌며 종이상자를 모으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1950년대가 아닌 지금 이 시대의 풍경입니다. 그 어르신들 얼굴은 얼마나 ‘소리없는’ 표정이던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유치환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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