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시인님의 시 '사랑의 발명'을 만납니다. 시인님은 언제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을까요? 저마다 사랑을 발명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읽기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 2013년) 중에서
이영광 시인님은 1965년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등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2003년 첫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를 낸 것을 비롯, 시집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 등을 출간했습니다.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전공 교수이며, 노작문학상, 지훈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세상 모든 사랑은 발명 아니던가요?
이 시가 실린 시집 「나무는 간다」가 2013년 나왔으니, 시 '사랑의 발명'은 시인님 30대 후반에 쓰인 시네요.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럴까요?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중에서
이이 그냥 두면 안 되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도저히 견디지 못할 삶의 어떤 국면이 이이를 짓누르고 있네요. '살다가'와 '살아보다가'는 얼마나 다른 시간인지요. '살아보다가'에는 '살다가'에 없는, 얼마나 많은 체념이 들었는지요.
체념하고 살아보는데도 도무지 안 될 것만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하네요. 저런 고답적인 방식으로요. 이런 방식은 옛날 도인들이 스스로 호흡을 멈추어 산으로 사라지는 방법 아닌가요? 그런데요, 그 과정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참으로 지독한 고독의 냄새가 피어납니다. 정말 이이는 그냥 두면 안 되겠어요!
나라도 곁에 없으면 /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 취해 말했지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중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사랑한다거나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거나 하는 직접적인 고백을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나'는 상대방의 뜨거운 심정을 금방 느낍니다. 어찌 그런 걸 모르겠는지요? 사랑이란 그렇게 뻔히 다 보이는 걸요.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중에서
발명!
참으로 '사랑'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영광 시인님의 시로 인하여 '사랑'과 정말 잘 어울리는 단어로 발전한 단어 '발명'이네요.
세상 모든 사랑은 발명 아니던가요?
똑같은 사랑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대만의 독창적인 사랑, 특허 등록은 안 되어 있지만 그 창의성은 매달 특허료 두둑이 받아 마땅하다고 빗방울이네는 생각합니다. 그런 창발적인 사랑의 콘텐츠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나의 다른 우주'를 그대 속으로 모셔왔겠는지요? 그게 어떻게 다른 이들과 같을 수 있겠는지요?
3. 김소월 → 유치환 → 황동규 → 강은교 → 황지우 → 김인육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을 읽으면서 그동안 이 '독서목욕' 블로그에서 만난 사랑시들이 주르륵 떠오르네요. 그리고 우리네 '사랑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표현과 자세와 속도에 대해서요.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 김소월 시 '진달래꽃' 중에서
김소월 시인님(1902~1934)이 20세 즈음 쓴 시입니다. 청년 김소월의 사랑법은 '반어법'이네요. 떠나려는 님에게 고이 보내 주겠다, 그 길에 진달래꽃도 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장과 허세 속에 감추어진 사랑은 진달래처럼 붉은데 어찌 그 님을 보낼 수 있겠는지요? 그래도 가지 말라는 말 차마 못하네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래도 상대방은 진달래꽃 뿌리는 그 마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사람을 혼자 두고 훌쩍 떠나겠는지요.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중에서
김소월 시인님 후세대인 황동규 시인님(1938~ )이 18세 때 쓴 시인데요, 홀로 남게 된 '나'는 진실로 사랑하는 그대를 한없이 기다린다고 합니다. 김소월 시인님의 반어법만큼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가 고백하지 않는 자세는 여전하네요. 사랑하는 그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네요. 이 지독한 사랑, 어쩌겠는지요?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 침묵할 것
- 강은교 시 '사랑법' 중에서
김소월 황동규 시인님의 후세대인 강은교 시인님(1945~ )은 타인을 내버려 두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고 합니다. 집착하거나 간섭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것이 강은교 시인님의 사랑법이네요.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그런데 여기서 우리네 사랑법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네요. 김소월 황동규 강은교 시인님의 후세대인 황지우 시인님(1952~ )의 시에서요. 기다림과 체념보다 과감한 고백의 사랑법이네요. 이 시 구절은, 시의 화자가 삶을 회고하면서 젊은 시절 많이 아팠던 날 그의 연인이 해준 말입니다.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라는 말은 얼마나 하나 되고 싶은 마음의 말인지요? 가장 뜨거운 '사랑 고백 문장'의 발명이네요.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 김인육 시 '사랑의 물리학' 중에서
위의 김소월 황동규 강은교 황지우 시인님보다 젊은 세대인 김인육 시인님(1963~ )의 사랑법은 물리학이네요. 인내와 절제가 쉽지 않습니다. 기다림요? 체념요? 그런 건 왜 하는데요?라는 듯이 마음이 움직이는 힘에 나를 맡겨두는 솔직한 사랑법입니다. 우리의 감정, 사랑도 자연현상의 하나이므로 자연스럽게 물리학 법칙을 따르겠네요. 이를 억제하거나 숨기면 병이 생기게 되어 있겠고요.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중에서
김소월(1902년생) → 황동규(1938년생) → 강은교(1945년생) → 황지우(1952년생) → 김인육(1963년생) 시인님보다 젊은 이영광 시인님(1965년생)의 사랑법은 사랑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이 저돌성, 창의성, 신속성!
이렇게 우리네 사랑법의 내력을 짚어보는 가운데 아득한 저 위쪽으로부터 유치환 시인님(1908~1967)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오네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유치환 시 '행복' 중에서
유치환 시인님은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일보다 행복한 이유는 또 다른 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 더 생기는 일이라서 행복하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먼저 고백하는 쪽이 새로운 하늘을 여는 쪽이어서 그 하늘 아래로 내 고운 사랑을 데려올 수 있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렇게 일곱 분 시인님들의 사랑법을 만나보니, 우리네 사랑법은 점점 변화하고 있었네요. 그 표현이나 자세나 속도가 확연히요. 표현은 솔직해지고, 자세는 적극적으로, 속도는 점점 빠르게요.
그러나 그 사랑법들은 나름대로 다 뜨겁네요. 시대가 변한다고 아무리 우리 사랑 변할까요? 금강석 같은 우리 사랑이요.
그런데요, 그대는 사랑을 발명하는 쪽인가요, 사랑의 발명을 기다리는 쪽인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김인육 시인님의 시 '사랑의 물리학'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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