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님의 시 '행복'을 만납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행복' 읽기
행복
-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 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 시선」(박승희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2.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천상병 시인님의 시 '행복'은 1987년 5월 「한국문학」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57세 때입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 '과연 무엇이 행복일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입니다.
나는 세계에서 /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 천상병 시 '행복' 중에서
참으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투입니다. 57세 시인님 속에 든 아이의 말요. 이런 '당당한 선언'은 너무나 평범한 동시에 너무나 비범한 것이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힘찬 어조로 나의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대단한 행복이기에 이렇게까지? 이런 생각 속에 다음 행이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당기네요.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 생활의 걱정이 없고 / 대학을 다녔으니 /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 명예욕도 충분하고 / 이쁜 아내니 /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 아내가 다 사주니 /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천상병 시 '행복' 중에서
「천상병 전집·산문」에 실린 시인님의 산문 '들꽃처럼 산 이순(耳順)의 왕자'에 따르면, 시인님은 간경화증이란 중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난 후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더 뚜렷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네 삶의 궁극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요.
시인님은 그때 '행복'에 대해 생각했네요. 위기상황에서 돌아와 자신을 둘러보니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깨달았네요.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요. 시인님은 무엇이 자신의 삶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시인님의 부인은 서울 인사동에 찻집('귀천')을 '경영'(이 단어에서 시인님의 자부심이 느껴지네요^^)해서 자신이 굳이 직장에서 돈을 벌지 않아도 생활의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상대 출신인 시인님은, 그래서 배움의 부족도 없다고 합니다(자부심 뿜뿜입니다.)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이 얼마나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네요. 대통령 자리도 부럽지 않은 시인님이네요.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이 구절은 다분히 '이쁜 아내' 기분 좋도록 넣은 구절이 분명(!)합니다.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 구절에서 왠지 행복보다 슬픔이 핑글 느껴지네요. 이 슬픈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문득 알게 됩니다.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요. 지금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시인님의 청빈한 모습에 우리를 비추어보게 하네요.
3.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더구나 /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 이 우주에서 /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 시 '행복' 중에서
하하. 다시 우리 시인님 '동심 빵빵'입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세속적인 이유들을 들고는 이렇게 아이 같은 말투로 우리 마음을 아이 마음이 되게 녹여주시네요.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참말로요. 우리는 이 구절 앞에서 망연(茫然) 해지네요. 하느님이 이 구절을 보면 아마 시인님의 강력한 빽이 안 되고는 못 배기실 것 같네요.
바로 마음이네요. 물질보다 마음요. 하느님을 믿는 바른 마음, 착한 마음, 바로 아이 마음요.
예수님도 아이가 되지 않으면 /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다 / 나는 아이같이 순진무구하게 / 지금같이 살았다
- 천상병 시 '아이들' 중에서
하느님 말씀을 굳게 믿고 '아이같이 순진무구하게' 사는 것이 시인님의 진정한 행복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
- 천상병 시 '나의 가난은' 중에서
'햇빛'을 '예금통장'에 쌓아두지 않고 세상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자신을 골고루 비춰주는 햇빛처럼 살고자 했던 가난한 시인님이네요.
간경화 치료를 받고 난 후
아내는 하루 주량을 맥주 두 잔으로 '언도'했는데
나는 이것을 한 번도 위반한 적이 없다.
그리고 열심히 시를 쓸 것이다.
천상(天上)의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
- 「천상병 전집·산문」(평민사)의 천상병 산문 '들꽃처럼 산 이순(耳順)'의 어린 왕자' 중에서
'언도'라고 쓰고 작은따옴표까지 씌웠네요. 이 말은 재판장이 판결하는 것을 말하는데, 죽을 고비를 넘긴 시인님이 아내의 말씀을 얼마나 엄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네요. 재판장의 판결이니 '한 번도 위반한 적이 없다'라고 합니다. 하하.
아내 말씀 잘 ‘준수’하고 나머지 할 일은 '열심히 시를 쓸 것'이라고 하네요. '열심히 돈을 벌 것이다'가 아니고요. 그리하여 시인님은 '천상의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 그야말로 돈은 안 되었을 천진난만한 시를 써서 가난한 우리네 마음을 이렇게 부유하게 해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시 '아이들'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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