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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노천명 시 남사당

by 빗방울이네 2023.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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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인님의 시 '남사당'을 만납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서글픈 남사당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노천명 시 '남사당' 읽기

 
男사당 
 
- 노천명(1911~1957, 황해도 장연)
 
나는 얼굴에 粉을 하고
삼딴가티 머리를 따네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둘르고 나는 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야 장터 어늬 넓운마당을 빌어
람프불을 도둔 布帳속에선
내 男聲이 十分 屈辱되다
 
山넘어 지나온 저村엔
銀반지를 사주고 십흔 
고흔 處女도 잇섯것만
 
  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處女야
나는 집시의 피 엿다
내일은 또 어늬洞里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山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군을 모흐는 날나리소리 처럼
슬픔과 기뿜이 석겨 핀다
 

- 노천명 시집 「窓邊」(노천면 지음, 매일신보사출판부, 1945년) 중에서

 

2. 시를 만나기 전에 만나는 몇 가지 이야기

 
노천명 시인님의 시 '남사당'은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에 세 번째 시로 실렸습니다. 
 
위에 옮겨 적은 시는 'ㅅㄷ'을 'ㄸ'으로 바꾼 것 외에 이 시집의 초판본에 나온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띄어쓰기도, 한자어도 그대로입니다.
 
읽기에 상그러운 초판본을 굳이 읽는 것은 물론 초판본의 맛을 그대로 느껴보기 위해서입니다. 시인님의 두근거리는 숨결이랄까요? 초판본은 처음 시집이 나왔던 시간의 정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후세에 노천명 시인님의 이름으로 나온 시집 속에 이 '남사당'이 실려있는데 현대어로 바꾸면서 달라진 글자도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현대어로 바꾼 것이 읽기는 쉬워도 초판본을 읽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점도 느꼈습니다.
 
시집 맨 뒤쪽에 있는 판권에 보니 발행연도가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20년이라고 되어 있어 1945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님 35세 때네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모두 세로 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명조체로 찍힌 글자들이 두껍고 아주 큼지막합니다. 요즘 큰 글씨 책을 보는 느낌입니다. 눈이 시원한 느낌입니다.
 
이 시 '남사당'은 초판본 시집의 8~9쪽에 걸쳐 실려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5연의 첫 행에 글자 하나가 탈락한 것 같습니다.
 
'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 처녀야' →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 처녀야'
 
'다'자가 탈락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글자의 자리가 비어있고 나중에 나온 시집에서는 모두 '다음날'로 바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자음과 모음의 활자를 하나씩 손으로 집어서 활판에 앉히는 작업을 하는데, 그 활판을 들고 인쇄하는 공정으로 옮길 때 가끔 활자가 삐져나와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활판 인쇄시절의 이런 실수는 흔한 일이었겠네요. 그래도 한 자 한 자에 의미가 달라지는 민감한 시집에 이 정도는 대형사고입니다. 시집 인쇄본을 받아 들고 '다'자가 빠진 사실을 발견한 35세 노처녀 시인님의 복잡한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아, 몰라, 이걸 어째!
 
식자공이 불려 오고 서로 얼굴을 붉히며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명함 크기의 정오표(正誤表)를 찍어 시집 앞마다 붙였겠네요. 그 당시 시인님은 '왕짜증'이었겠지만, 후세의 우리는 참 재미있네요, 후후!
 

"기쁨과슬픔이섞여"-노천명시'남사당'중에서.
"기쁨과 슬픔이 섞여" - 노천명 시 '남사당' 중에서.

 

 

 

3. 정처 없이 유랑하는 어느 남사당의 서글픈 이야기

 
노천명 시인님은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시 '사슴'을 쓴 시인입니다.
 
시 '남사당'이 처음 발표된 때는 1940년, 시인님 29세 때네요. 
 
남사당은 조선후기 즈음부터 무리를 지어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 풍물연주, 각종 재주 부리기를 하던 남자를 말합니다. 그런 공연을 하는 남자들의 무리를 남사당패라고 하고요.
 
그 공연을 본 시인님은 어떤 남사장에게 남다른 연민을 느꼈네요. 시인님의 성정도 애수와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고, 잠시 무대에서 연극('극예술연구회의 '연극 '앵화원'에서 라네프스까야의 딸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얼굴에 粉(분)을 하고 / 삼딴가티 머리를 따네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 다홍치마를 둘르고 나는 香丹(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야 장터 어늬 넓운마당을 빌어 / 람프불을 도둔 布帳(포장)속에선 / 내 男聲(남성)이 十分(십분) 屈辱(굴욕)되다

- 노천명 시 '남사당' 중에서

 
남사당패에는 말 그대로 남자뿐입니다. 그래서 공연놀이를 보여줄 때 여자배역을 남자가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남사당 중에서 그 여자역할을 하게 된 어리고 고운 남자였겠습니다. 춘향전의 한 대목을 공연하는지,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홍치마를 입고 향단이가 된다고 하네요.
 
조라취(취라치)는 예전에 군대에서 나각을 불던 취타수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공연 시작을 알리는 남사당패의 구성원입니다. '포장(布帳)'은 무대와 객석이 있는, 천으로 만든 막사를 말하네요. 그 무대 위에서 향단이가 된 '사나이'는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향단이 대사를 읊었네요. '내 男聲(남성)이 十分(십분) 屈辱(굴욕)되다'. '사나이'의 서글픔이 물씬 묻어나네요.
 
山넘어 지나온 저村(촌)엔 / 銀(은)반지를 사주고 십흔 / 고흔 處女(처녀)도 잇섯것만
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 處女(처녀)야 / 나는 집시의 피 엿다 / 내일은 또 어늬洞里(동리)로 들어간다냐

- 노천명 시 '남사당' 중에서

 
지난번 공연을 하던 마을에서 고운 처녀를 만났네요. 결혼하고 싶은 처녀였지만 '나'는 정착해 살 수 없는 몸입니다. '집시의 피'라고 하네요. 집도 없이 가족도 없이 끊임없이 유랑하는 쓸쓸한 삶입니다.  
 
우리들의 道具(도구)를 실은 / 노새의 뒤를 따라 / 山(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 길에 오르는 새벽은

- 노천명 시 '남사당' 중에서

 
이제 또 어느 동네로 가는 걸까요?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극단입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고 있네요. 짐 실은 노새 뒤를 따라 이슬 묻은 산딸기를 따 옷에 슥슥 닦아 먹기도 하면서요. 그러면서 '길에 오르는 새벽은' 하고 다음 행을 바로 잇지 않고 연을 바꿉니다. 시 속의 '나'는 지금 서러움이 울컥 올라와 숨을 쉴 수 없어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느낌입니다.
 
구경군을 모흐는 날나리소리 처럼 / 슬픔과 기뿜이 석겨 핀다

- 노천명 시 '남사당' 중에서

 
앞 연에서 이어 보면 '길에 오르는 새벽은 /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가 됩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네요. 남자인데 여자로 '나'의 모습을 꾸며야 하는 굴욕을 벗 삼아 부초처럼 떠도는 서글프고 서글픈 하루가 시작되었네요.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회에서 무엇이든 크고작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그대는 오늘 하루 가면을 몇 개나 쓰고 벗고 했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독서목욕'에서 노천명 시인님의 시 '푸른 오월'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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