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주막'을 만납니다. 붕어곰 호박잎쌈이 맛있고 순박한 범이가 사는 시인님의 단골 맛집 '주막'으로 갑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주막(酒幕)' 읽기
酒幕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호박닢에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맛있었다
부엌에는 빩앟게질들은 八모알상이 그상웋엔 샛파란 싸리를그린 눈알만한盞이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잘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동갑이었다
울파주밖에는 장군들을따러와서 엄지의젓을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1936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백석 시집 「사슴」(백석 지음, 소와다리 출판, 2016년 2판1쇄) 중에서
2. 시인님 단골 맛집 메뉴는 '붕어곰 호박잎쌈'
백석 시인님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정주의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하기까지 고향 정주에서 살았습니다. 유소년 시절(1912~1929)을 따뜻한 공동체 속에서 이웃과 하나로 어우러져 사랑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백석 시인님의 '주막'은 1935년 「조광」 11월호에 처음 발표됐습니다. 시인님 24세 때입니다. 이 때는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온 뒤 조선일보 교정부·출판부에 근무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던 때입니다.
그런 즈음, 시인님은 고향의 어떤 주막을 떠올리며 이렇게 추억합니다.
호박닢에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맛있었다
- 백석 시 '주막' 중에서
자신이 자주 갔던 '주막'이네요. '언제나 맛있었다'라고 했으니 한 두 번 간 주막이 아닙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맛있었다고 합니다. 그대도 그대만의 '주막'이 있겠지요. 백석 시인님의 주막은 '붕어곰' 맛집이네요. 이 첫 행에서 '붕어곰 호박잎쌈'을 떠올리는 시인님 목울대가 움지럭하는 것이 보이네요.
그런데 평북 정주의 이 '붕어곰'은 매우 궁금한 음식입니다. 보통 '곰'은 소나 염소를 솥에 넣어 푹 끓인 것을 말하는데 '붕어곰'이면 붕어를 오래 곤 걸까요? 그런데 호박잎에 싸 먹는다고 하니 국물 종류는 아닐 것입니다. 호박잎에 밥을 얹고 싸먹는 것이라면 양념장 형태여야 할 것이네요. 그러면 붕어찜에 가까운 음식인 듯합니다.
국어사전에 '붕어곰은 호박잎에 싸 먹어야 맛있다'는 예문이 있을 정도로 호박잎쌈과 붕어곰은 잘 어울리는 음식임에 분명하니 어서 먹어보고 싶네요.
부엌에는 빩앟게질들은 八모알상이 그상웋엔 샛파란 싸리를그린 눈알만한盞이뵈였다
- 백석 시 '주막' 중에서
시인님은 남의 주방까지 얼씬거렸네요. 이렇게 맛난 '붕어곰 호박잎쌈'을 내는 주방은 어떤 곳인고? 하면서 그 큰 키로 어슬렁거리면서요.
그때 시인님의 눈에 부뚜막에 놓인 팔모알상이 들어왔네요. 소반(상)인데, 테두리가 팔각형, 상다리 모양이 개의 다리처럼 휜 소반이네요. 이 소반은 빨간 옻칠이 되어 있는데, 빨갛게 길이 들었다는 것을 보니 주막 주인이 얼마나 바지런한 지 얼마나 깔끔한 성품인지 느껴집니다. 닦을수록 반질반질 빨갛게 윤이 나니까요.
그 상 위에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 만한 술잔(盞)이 놓여있었네요. '눈알 만한 잔'은 아주 작은 잔이니 도수가 높은 중국의 소주인 '빼갈' 잔이겠습니다. '새파란 싸리'를 그렸다면 희고 매끄러운 사기로 된 잔이었네요. '새파란'은 청색이 아니라 녹색을 말합니다. 세잎씩 묶여서 피는 싸리잎의 초록 이파리가 그려진 하얀 사기잔이 우리 눈에도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 '주막'이 허름한 주막일지라도 붕어곰이 맛있고 주인의 품성 깔끔하고 빼갈을 내는 특별한 정취(情趣)를 가진 주막이라는 점을 알겠습니다.
3. 앞니가 뻐드러진 범이는 내 동갑내기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잘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동갑이었다
- 백석 시 '주막' 중에서
아들아이는 뻐드렁니라고 하네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면 얼마나 순박한지요. 뻐드렁니가 부끄러워 말수가 적었을까요?
그런데 뻐드렁니를 보면, 왜 무장이 해제되고 다가가고 싶은지요. 이 가족의 성격은 얼마나 유순하기에 아들 이름을 '범'이라고 했을까요? 범처럼 좀 씩씩한 사람으로 커 주었으면 하는 뜻이겠지요.
범이는 장고기를 잘 잡는다고 합니다. 장고기는 잔고기, 즉 붕어나 피라니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를 말합니다.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올리고 냇가 기슭에 그물채를 쑤시곤 하는 시골소년입니다. 피부는 햇볕에 타 까무잡잡했겠지요.
그런 소년이 '나와 동갑이었다'라고 하는 구절에 어쩐지 힘이 느껴지네요. '그 친구, 내 동갑이야!' 시인님은 주막집 아들 동갑내기 범이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리워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범이가 좋아지고 어쩐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울파주밖에는 장군들을따러와서 엄지의젓을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백석 시 '주막' 중에서
장날 풍경입니다. 장날이 되면 주막 울타리(울파주) 밖에는요, 장사꾼(장군)들의 짐을 나르는 말이 있었는데 어미(엄지) 젖을 빠는 새끼(망아지)가 있었다네요. 주막이 맛집이라 안에는 손님들이 붕어곰 호박잎쌈을 안주로 맛나게 술잔을 주고받거니 하고요, 울타리 밖에는 망아지들이 어미젖을 빠느라 분주하고요. 시 속으로 들어가 망아지 등을 쓰담쓰담하고 싶어지네요. 입을 크게 벌리고 붕어곰 호박잎쌈도 먹어보고요.
시인님, 이 '붕어곰 호박잎쌈 맛집' 어디에 있는 주막인가요? 가서 먹어보려고요.
1행: ~ 맛 있었다, 2행: ~ 잔이 뵈였다, 3행: ~ 나와 동갑이었다, 4행: ~ 망아지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 주막이 없어졌다는 말일까요?
그렇게 소박한 붕어곰 호박잎쌈 한 입이면 배 불렀는데, 동갑내기 범이만 있으면 든든했는데, 망아지 눈 맞추며 놀면 그걸로 족했는데 이제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일제강점기에, 근대화의 물결 속에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 즈음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거리를 걷고 있는 '모던 보이' 백석 시인님은 외롭네요. 옛날 '주막'이 있던 고향에서의 삶, 공동체 속에서 오손도손 서로 나누며 공유하며 큰 걱정 없이 행복했던 삶을 그리워하고 있네요. 어깨를 움츠린 시인님과 나란히 걸으며 그 '주막'을 찾아가 '눈알만 한 잔'에 연태고량주 한잔 하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적경'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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