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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종삼 시 민간인

by 빗방울이네 202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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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시인님의 시 '민간인'을 만납니다. 일곱 줄의 짧은 시이지만 한 권의 책보다 더 긴 사연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종삼 시 '민간인' 읽기

 
민간인(民間人)
 
- 김종삼(1921~1984, 황해도 은율)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 「김종삼전집」(권명옥 엮음·해설, 나남출판, 2005년) 중에서 

 

2. 시인님의 대표시 중 하나 '민간인'

 
김종삼 시인님의 시 '민간인'은 1970년 「현대문학」을 통해 처음 발표됐습니다. 시인님 49세 즈음이네요. 
 
위 책에 실린 '김종삼 연보'에 따르면, 시인님이 돌아가신 10년 후인 1993년, 광릉수목원 중부임업시험장 입구에 시인님의 시비(詩碑)가 건립됐습니다. 이 시비에는 2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시비 윗면에는 '북치는 소년'이, 옆면에는 '민간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두 편의 시가 후배 문인들이 꼽은 김종삼 시인님 대표작이네요.
 
과연 어떤 시일까요?
 
시 제목을 '민간인'이라고 해두고, 시인님은 첫연에서 이렇게 어떤 때와 장소를 제시해두었네요.
 
1947년 봄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이 때는 한반도가 38선으로 남북이 막혀있던 시기입니다. 1945년 8월에 38선이 봉쇄되며 북쪽은 공산화가 진행됐고, 남쪽은 1946년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47년 봄'이면, 그래서 남과 북이 서로 오고갈 수 없는 상황이었네요.
 
그래서 몰래 38선을 넘는 시도가 이어졌고, 해안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심야(深夜)를 틈타서 배를 빌려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深夜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시인님은 이 깜깜한 두 글자를 한 행으로 앉혔네요. 두 글자를 골똘히 바라보니 깜깜한 어둠,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눈빛들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추운 새처럼 떨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요. 이 두 글자가 주는 긴장감이 이 세상의 밤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습니다.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황해도 해주', '이남', '이북', '경계선'은 모두 한자로 써놓고 '용당'만 한글로 남겨두었네요. 그래서 뒤에 붙은, 바닷가를 뜻하는 '浦(포)'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네요. 바닷가라는 것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장소가 육지와 가까운 바다 위라는 점을 알 수 있겠습니다.
 

"수심을모른다"-김종삼시'민간인'중에서
"수심을 모른다"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3.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해안 경비를 서고 있는 초병에게 행여나 들킬까봐 노 젓는 물소리도 안 나게 '조심 조심 저어' 먼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네요. 자그마한 배의 갑판 위에 모두 겁에 질린 채로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고 바짝 엎드려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 행에서 시인님은 사공의 몸짓만 표시했는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이 배 위에 타고 있는 것처럼 이 순간의 긴박한 상황을 다 느낄 수 있네요.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아, 어떻게 이런 일이요. 위기일발의 순간에 영아(嬰兒), 아직 젖을 먹는 아기가 울음 터뜨리고 말았네요.
 
배에 탄 사람들은 가족인가 봅니다. 어른들은 얼마나 당황했겠는지요? 그 절박한 순간, 아기를 수장시켜야했네요. 울음을 막기 위해서요. 그 울음 때문에 자신들이 발각될까봐요. 다수가 살기 위해서요. 이토록 가련한 아기의 운명,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지요.
 
시인님은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이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 한 줄에는 숨막히는 긴박감 속에 터진 아기 울음 →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으로 → 소중한 아기를 캄캄한 바닷물에 밀어넣고 → 혼백이 다 날아가버렸을 어른들의 하얀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시 구절 속의 아기 '영(嬰)'자를 가만히 바라보니, 아기가 한스러운 빛이 가득한 두 눈동자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 김종삼 시 '민간인' 중에서

 
1947년 봄에 벌어진 일이었고, 시인님이 이 시를 쓴 때는 1970년입니다. 그러니 스무 몇 해나 지난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 상처가 아물 수 있겠는지요?
 
아무리 세월이 약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어린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해야했던 사람들의 아픔, 죄의식을 무슨 수로 치유할 수 있겠는지요?
 
2연의 '水深(수심)'은 1연의 '深夜(심야)'와 연결되어 이토록 캄캄한 어둠, 숨막히는 고통이 온세상을 꽉 채우는 것만 같습니다. 
 
분단이나 전쟁 같은 참혹한 상황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는 이, 이념에 휘둘려 상처받는 희생자는 바로 이 시의 제목 '민간인'입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아니 이제 '70년이 훨씬 지나서도' 과연 그 민간인들이 당한 고통의 '수심'을 알 수 있겠는지요? 아니 우리는 그 비극의 내력을 제대로 살펴주기나 했을까요?

아, 사랑하고 사랑하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종삼 시인님의 시 '걷자'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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