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님의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을 만납니다. 한 폭의 아름다운 미인도(美人圖)를 보는 듯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고풍의상(古風衣裳)' 읽기
고풍의상(古風衣裳)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접(蝴蝶)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ㅅ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조지훈 시선」(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중에서
2.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은 조지훈 시인님의 등단작품입니다.
시인님은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가 정지용 시인님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러니 20세 즈음의 작품입니다.
'고풍(古風)'은 예스러운 풍취나 모습의 뜻, '의상(衣裳)'은 '겉에 입는 옷'이라는 뜻과 함께 '여자들이 입는 저고리와 치마'라는 뜻이 따로 있네요.
시 제목 '고풍의상(古風衣裳)'은 '한국 여인들이 입는 예스러운 전통적 의상'이라는 의미로 새겨봅니다.
우리의 정신문화가 말살되어 가던 일제강점기 때의 시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시가 더 각별하게 다가오네요.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 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반원(半月)이 숨어 /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시간은 고요한 봄밤이네요. 장소는 고풍스러운 기와집입니다.
'부연(附椽)'은 기와집의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말합니다. 처마 끝을 위로 들어 올려 모양이 나게 하는 구조물이네요. 하늘로 날아갈 듯 날렵한 처마 끝에 달린 풍경(작은 종)이 바람에 흔들리며 울고 있습니다.
그 처마 끝에는 '주렴(珠簾)'도 달려있네요. '주렴'은 밖에서 집안이 안 보이게 문에 거는,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든 발을 말합니다. 그 발 뒤에 반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밤입니다.
'느리운'. '늘어뜨린'의 뜻인데 '늘어뜨린' 보다 더 부드럽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네요. 그렇게 '느리운 주렴' 사이로 반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밤입니다. 반달이니 아주 밝은 달밤은 아니고 은은한 달밤이네요.
'아른아른'. 무엇이 희미하게 보이다 말다 하는 모양을 표현하는 부사인데요, 그렇게 들릴 듯 말 듯 멀리서 두견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렇게 아득하게 깊어가는 봄밤이네요.
시 도입부에서 한(恨)을 상징하는 두견이 울음소리가 고요하고 은은한 봄밤의 정서를 고조시켜 주네요.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 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그 고요한 봄밤에, 고풍스러운 기와집 대청마루에 한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아름다웠으면 '곱아라 고아라'라고 두 번씩이나 감탄하고 있네요. 시인님의 고향 말('곱아라')까지 섞어 말입니다.
그 여인의 호장저고리를 보여주네요. 저고리는 전체적으로 '파르란 구슬 빛'이라고 하고요, 자줏(자지·紫芝)빛의 장식헝겊으로 멋을 낸 저고리라고 합니다.
'호장저고리'의 '호장'은 '회장(回裝)'이 본말입니다. '회장'은 여자 저고리의 깃이나 끝동, 고름 따위에 대어 꾸미는 색깔 있는 헝겊 또는 그런 꾸밈새를 말하네요.
'동정'은 한복 저고리 깃 위에 좁게 덧대어 꾸미는 하얀 헝겊을 말합니다. 때가 타면 이 동정만 따로 떼어 새 동정으로 갈아서 입었습니다.
파르란 구슬 빛 저고리에 덧대어 멋을 댄 자줏빛 회장, 거기에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라고 하네요. '밝도소이다'는 '밝기도하오이다'의 더 예스런 표현이겠지요?
목덜미를 감싼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에서 그 환한 동정에 반사되어 더 하얘진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고요.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시인님은 이제 여인의 치마를 보여주시네요.
'살살이'는 무슨 말일까요? '살그머니', '살짝이' '부드럽게' 같은 느낌이 묻어나네요. 그렇게 퍼져 아래로 내린 곧은 선은 치마의 주름선을 말하네요. 열두 폭으로 되어 있는 풍성한 치마입니다.
대청마루에 나타난 여인의 움직임에 따라 그 풍성하게 기다란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라고 합니다. 한 손으로 치마를 여미며 걷고 있는 우아한 여인의 자태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3. 한 폭의 우아한 미인도(美人圖)를 보는 듯한 시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초마'는 '치마'의 방언입니다. 바로 앞 행에서 '치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초마'라고 했네요. '초마'라는 고향 말이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느낌입니다. 눈앞에 그만큼 예쁜 일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 시에서 나오는 방언들이 시의 맛을 한층 살려주고 있네요.
'운혜(雲鞋)' '당혜(唐鞋)'는 신발입니다. '혜(鞋)'는 신발, 또는 가죽신을 말합니다. 신발 앞코에 구름무늬를 한 신발이 '운혜', 울(신발의 양쪽 가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부분)이 깊고 앞코가 작은 가죽신이 '당혜'입니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여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마 끝으로 신발 앞코가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하네요. 그래서 운혜인 듯도 하고 당혜인 듯도 하다는 뜻일까요?
한복을 입은 여인은 그렇게 예쁜 신발을 신고 발소리도 안 내고 미끄러지듯 대청마루를 지나서 방문을 열고 있네요.
그런 자태를 보고 시인님은 그 여인을 '호접(蝴蝶)', 호랑나비 같다고 합니다. 여인이 입은 한복은 호랑나비의 날개처럼 섬세하게 하늘거리고 화려하다는 비유겠네요. 그 고풍의상의 여인이 한 나라의 고전미(古典美)를 상징하는 한 마리 호랑나비라고 합니다.
호접(蝴蝶)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 /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 눈 감고 거문고ㅅ줄 골라 보리니 /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호접이냥 사푸시 춤을 추라'. 여인에게 마치 호랑나비라도 된 것처럼 춤을 추라고 권하네요. '사푸시'는 방언일 텐데요, '살포시, 살며시, 조용히' 같은 의미가 떠오르네요.
'아미(蛾眉)'를 숙이고. '아미'는 누에나방의 눈썹이라는 뜻으로 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을 이르는 말입니다.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이 구절이 참 좋네요. 여인의 아름다운 고풍의상에 반해서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고풍의상을 입고 살았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 느껴집니다. 그 옛날에 하듯 자신은 눈 감고 거문고 줄을 맞춘다고 하네요.
그리고 자신의 거문고 가락에 맞추어 낭창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춤을 추라고 권합니다.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에서 '흔들어지이다'는 어떤 뜻일까요? '흔들지어다' '흔들어지다' '흔들어젓히다' 같은 뉘앙스가 다 섞여있는 것만 같습니다. 명령하는 느낌보다는 당부하는 느낌, 함께 흥에 취해보자는 권유의 느낌도 들고요.
그러니 여인의 손만이 아니라 나의 손도 '흔들어지이다'였겠지요. 참으로 고즈넉하고도 설레는 아름다운 밤이네요.
조지훈 시인님의 시 '고풍의상'을 읽으니 한 폭의 우아한 미인도(美人圖)를 감상하는 기분이 듭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 정신문화의 한 장면을 시라는 화폭에 그려 오래 간직하고 공유하고 싶었던 시인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조지훈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유불급 뜻 (95) | 2024.06.11 |
---|---|
김영랑 시 뉘 눈결에 쏘이었소 (95) | 2024.06.10 |
프랑시스 잠 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89) | 2024.06.06 |
문태준 시 가재미 (91) | 2024.06.05 |
윤동주 시 간판 없는 거리 (88) | 2024.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