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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조지훈 시 낙화

by 빗방울이네 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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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님의 시 '낙화'를 만납니다. 낙화의 쓸쓸함, 삶의 막막하고 외로운 시간을 노래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낙화' 읽기

 
낙화
 
조지훈(1920~1968년, 경북 영양)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우름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초ㅅ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시선」(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중에서.
 

2. 지는 꽃처럼, 스러지는 별처럼, 홀로 우는 새처럼 

 
조지훈 시인님의 시 '낙화'를 원본으로 감상합니다.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공동시집인 「청록집」(1946년)에 실린 시입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
 
'지기로소니'에서 '~로소니'는 옛말로 '~오니'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꽃이 지기로소니'는 '꽃이 지오니'라는 의미일 것인데,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무언가 허전하네요.
 
그러면 연결어미 '~로서니'는 어떨까요?
 
'~로서니'는 앞 절의 사실을 양보하여 인정한다고 하더라고 뒤 절의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음을 힘주어 나타내는 말입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뒤에 나오는 '바람을 탓하랴'를 구절을 보면, '지기로소니'의 '~로소니'는 '~오니'의 의미보다 '~로서니'로 새겨 '지기로서니'로 읽는 것이 더 알맞을 것 같습니다.
 
시인님의 말처럼 세상의 꽃이 지는 까닭이 어찌 바람 때문만이겠는지요? 
 
바람이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시인님은 지금 떨어지는 꽃을 보면서, 때가 되면 오고 가는 자연의 질서를 생각하고 있네요. 
 
우리네 삶도 그렇다는 시인님의 눈짓이겠지요?
 
'주렴 밖의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주렴'은 커튼처럼 앞을 가리기 위해 문에 치는 발을 말합니다.
 
'성긴 별'. '성기다'의 뜻은 '물건의 사이가 뜨다'입니다. 별이 몇 개 남지 않았다는 의미네요.
 
주렴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하늘에 몇 개 남지 않는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있다고 하네요.
 
시인님은 이렇게 뜬 눈으로 새벽을 맞고 있습니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시인님입니다. 떨어지는 꽃도 보고 별도 보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귀촉도 우름 뒤에 / 머언 산이 닥아서다'
 
'귀촉도'는 두견새라고도 하는데, 그 구슬픈 울음소리 때문에 문학작품 속에서 외로움과 슬픔, 한(恨)의 표상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니 '귀촉도 우름(울음) 뒤에'라는 구절에는 시인님의 외로움이 스며있는 것만 같습니다.
 
새벽이니 귀촉도 울음은 환청이었을까요? 그 울음을 듣고 산에서 웅크려 자신처럼 울고 있을 귀촉도를 생각하니 먼 산이 가까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산속에 숨어 우는 귀촉도에서 자신의 슬픈 모습을 보았네요. 
 
'초ㅅ불을 꺼야 하리 / 꽃이 지는데'
 
꽃이 지는 것처럼 자신도 지고 싶은 심정일까요?
 
촛불을 끄고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 말입니다.
 
그 화려했던 꽃이 소리 없이 지는 쓸쓸한 시간, 촛불을 끄고 그 쓸쓸함을 오롯이 가슴에 끌어안고 싶었을까요?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 시 '낙화' 중에서.

 

 

3.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 하이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빗방울이네는 이 5연과 6연이 참 좋습니다.
 
'우련'의 뜻은 무얼까요?
 
①'우련하다'는 '형태가 약간 나타나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 또는 '빛깔이 엷고 희미하다'는 의미가 있네요.
 
②'우련(優憐)'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뜻은 '특별히 가엾게 여김'이네요.
 
이 시에서는 ①②의 뜻이 모두 겹쳐져 있는 것으로 새겨봅니다.
 
그러면 '우련 붉어라'에서는 '희미하게 붉은 슬픔' 같은 아주 특별한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다시 5, 6연을 가슴에 안아봅니다.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 하이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꽃이 지는 그림자가 이렇게 미닫이 문에 비칠 정도겠는지요?
 
이 비련의 구절은 시인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의미겠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새벽을 맞은 지금 시인님의 마음이 우련하게 붉다는, 슬픔으로 가슴이 붉게 물었다는 뜻 말입니다.
 
참으로 가련(可憐)한 시인님!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묻혀서 사는 이의'. 왜 묻혀서 산다고 했을까요?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에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시인님은 1941년 22세 때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로 취임해 반항적 은둔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일제강점기의 폭압이 거세지던 시간이네요.
 
이 시공간은 중·일전쟁(1937년)과 미·일전쟁(1941년)의 틈바구니 -.
 
이 때 조선청년들의 시간은 언제 일제의 징용에 끌려갈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에 쫓기던 시간입니다.
 
1939년 등단 후 시인님의 첫시집이기도 한 「청록집」(1946년)에 실린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시인님이 월정사에 은둔해 있을 때(1941년) 쓴 시로 여겨집니다.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그렇게 묻혀서 살지만, 그렇게 묻혀서 떨어지는 꽃처럼, 스러지는 별처럼, 산속에서 홀로 우는 귀촉도처럼 외롭게 서럽게 살지만 '고운 마음'이라고 하네요.
 
더러운 일제의 치하에서 어떤 폭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꼬임에 결코 야합하지 않는 '고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 마음은 참 서럽고도 뜨거운 마음이겠습니다.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저허하다'는 '저어하다'의 옛말입니다. '저어하다'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다'라는 뜻이고요.
 
이렇게 산속에 묻혀서 사는 이의 변함없이 '고운 마음'을, 지조(志操)를 지키는 꼿꼿한 마음을 아는 이가 있기는 할까, 그렇게 저어하고 있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묻혀서 사는 이'의 망국의 서러움이 왈칵 쏟아지고 있는 것만 같은 구절이네요.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누구라도 꽃처럼 지게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온순한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마음 놓고 안아보지 못한 꽃이 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봄은 가는데 조국의 봄은 오지 않고 사방이 꽉 막힌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 암울의 시간, 떨어지는 꽃을 보며 속절없이 지나가는 삶의 시간을 떠올렸을까요? 
 
그런 아침은 '울고 싶어라'라고, 낮고 깊게 독백하는 아침이겠네요.
 
지금은 '묻혀서 사는 이'이지만 그런 '고운 마음'의 시인님에게 다가가 가만히 등을 쓸어주고 싶어지는 시네요.
 
어쩌면 우리도 '묻혀서 사는 이'이겠지요?
 
꽃이 지고 있네요. 봄이 다 가고 말았습니다.
 
아, 우리네 마음 '우련 붉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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