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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영랑 시 뉘 눈결에 쏘이었소

by 빗방울이네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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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님의 시 '뉘 눈결에 쏘이였소'를 만납니다. 누구의 눈결에 쏘여 온몸 온마음 붉어져 간질거리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영랑 시 '뉘 눈결에 쏘이었소' 읽기

 

4

 

김영랑(본명 김윤식, 1903~1950, 전남 강진)

 

뉘 눈결에 쏘이엿소

왼통 수집어진 저 하날빛

담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밧게 봄은 벌서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두리 단두리 로다

뷘 골ㅅ작도 붓그려워

홀란스런 노래로 힌구름 피여올리나

그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 「영랑시집(永郞詩集)」(김영랑 지음, 문학사상사 엮음) 중에서

 

2. '재앙스럽소'의 뜻은?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김영랑 시인님의 시 '뉘 눈결에 쏘이었소'를 만납니다.

 

시인님의 시집 「영랑시집」 원본에는 시의 제목 대신 시 배치 순서대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뉘 눈결에 쏘이었소'는 제목 자리에 번호 '4'가 붙어있네요.

 

'뉘 눈결에 쏘이엿소 / 왼통 수집어진 저 하날빛 / 담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 밧에 봄은 벌서 재앙스럽소'

 

이 시에서 '재앙스럽소'가 덜커덕하고, 잘 달려가던 우리 눈길에 브레이크를 거네요.

 

재앙스럽다? 

 

국어사전에 '재앙(災殃)'은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를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날벼락'이 올라있네요.

 

그러나 그런 뜻은 이 영롱한 김영랑 시인님의 시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재앙스럽소'는 방언일까요? 맞습니다. 시인님 고향은 전남 강진입니다. 전라도 방언 중에 '재앙궂다' '재앙시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난스럽게 남을 괴롭고 귀찮게 하는 데가 있다'라는 뜻의 '개구지다', '몹시 짓궂은 데가 있다'는 뜻의 '시망스럽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 나오는 '재앙스럽소'는 '몹시 짓궂은 데가 있다'는 뜻으로 새겨지네요. 그러면 시 속의 이 '재앙스럽소'는 얼마나 정다운 말인지요?

 

'재앙스럽소'의 뉘앙스를 떠올리며 1연을 다시 만나봅니다. 시가 가슴으로 와락 안겨오네요.

 

'뉘 눈결에 쏘이엿소 / 왼통 수집어진 저 하날빛 / 담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 밧에 봄은 벌서 재앙스럽소'

 

'눈결'이라는 단어도 참 곱네요. '마음이 눈에 드러난 상태'를 말합니다. '다사로운 눈결' 같은 쓰임새가 있겠고요.

 

'뉘 눈결에 쏘이었소(쏘이엿소) / 온통(왼통) 수줍어진(수집어진) 저 하늘빛(하날빛)'. 여기서 표현되는 대상은 하늘빛입니다. 하늘빛이 수줍어한다고 하네요. 봄날의 저녁일까요? 저녁하늘이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었을까요?

 

시인님은 그런 하늘빛을 보고 '뉘 눈결에 쏘이엇소'라고 묻네요. '눈결에 쏘이다'는 말은 얼마나 정다운 말인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어떤 뜨거운 '눈결'에 쏘인 적이 있는 그대도 그 눈결에 온통 수줍어진 적이 있겠지요. 그 눈결에 온몸 온마음 붉게 물든 적이 있겠지요. 그렇게 물든다면 누구라도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담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복숭아꽃도 '뉘 눈결'에 쏘이었나 봅니다. 복숭아꽃, 도화(桃花)는 미색(美色)의 상징입니다. 그 빛깔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도화분(얼굴에 바르는 복숭아꽃 빛깔을 띤 분), 도화색(복숭아꽃의 빛깔과 같이 붉은색) 같은 말이 있을 정도네요.

 

뉘 눈결에 쏘였을 때, 그대 마음 어떻던가요? 안절부절 허둥지둥,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얼굴은 온통 붉어지지 않던가요? 시인님은 복숭아꽃을 대표선수로 내보이면서 이렇게 만물이 '뉘 눈결'에 쏘인 듯하다고 합니다.

 

'밖에(밧게) 봄은 벌써(벌서) 재앙스럽소'. 봄은 '예상보다 빠르게' 또는 '이미 오래전에' 몹시 짓궂다고, 참으로 개구지다고 하네요. 봄은 이렇게 만물에게 꽃침을 날리네요.

 

그런데요, 이는 모두 시인님의 마음이겠지요? 이 봄날 시인님도 봄의 몹시도 개구진 꽃침을 맞아 붉은 복숭아꽃처럼 온통 수줍어진 상태이네요. 이를 어쩌겠는지요?

 

"뉘-눈결에-쏘이었소"-김영랑-시-'뉘-눈결에-쏘이었소'-중에서.
"뉘 눈결에 쏘이었소" - 김영랑 시 '뉘 눈결에 쏘이었소' 중에서.

 

 

 

3. 왜 빈 골짝인데 부끄러울까요?

 

'꾀꼬리 단두리 단두리 로다 / 뷘 골ㅅ작도 붓그려워 / 홀란스런 노래로 힌구름 피여올리나 / 그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2연에서 잘 달려가던 우리의 시선을 '홀란스러운'이 막아서네요. '혼란스러운'일 텐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혼란스러운'의 뜻일까요?

 

'혼란(混亂)스럽다'는 '보기에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고 질서가 없는 데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는 다른 한자어 '혼란(混瀾)스럽다'도 있는데요, 그 뜻은 '보기에 어른어른하는 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데가 있다'입니다. 영롱한 영랑의 시에 잘 어울리는 후자로 새깁니다.

 

'혼란(混瀾)스럽다'의 유의어로는 국어사전에 '눈부시다, 찬란하다, 황홀하다'가 올라 있네요. 이 시에 딱 어울리는 '혼란스럽다'입니다.

 

'홀란스런'의 뜻을 다시 새기며 다시 2연을 음미해 봅니다.

 

'꾀꼬리 단두리 단두리 로다 / 뷘 골ㅅ작도 붓그려워 / 홀란스런 노래로 힌구름 피여올리나 / 그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2연의 압권은 '뷘 골ㅅ작도 붓그려워'이네요. '빈 골짝도 부끄러워'. 아무도 없는 빈 골짝인데도 부끄럽다고 하네요. 꾀꼬리들이요. 이 꾀꼬리는 이 빈 골짝에 단둘이 뿐인데 말입니다. 

 

'꾀꼬리 단둘이 단둘이로다'. 시인님은 2연의 시작을 이렇게 남도 판소리 한가락처럼 길게 내뽑았습니다. 이 구절에서 어쩐지 '얼레리 꼴레리'의 뉘앙스가 풍기지 않는지요? '얼레리 꼴레리'의 표준어는 '알나리깔나리'입니다. '알'을 낳는 일과 관계있는 말이네요. 꾀꼬리 단둘이 '얼레리 꼴레리' 하고 있네! 시인님도 참 '재앙스러우시네요'!

 

그렇게 아무도 없는 빈 골짜기에 꾀꼬리 두 마리가, 봄날에 본능적 충동에 충실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빈 골짜기가 자기네 행각을 본다고 부끄럽다고 하네요.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어올리나'. 우리 시인님의 보석 같은 상상력 좀 보셔요. 그렇게 빈 골짜기가 자기네 훔쳐볼까 봐 꾀꼬리 두 마리는 황홀한(홀란스런) 노래로 흰구름을 피워 올린다고 하네요.

 

꾀꼬리는 노래로 골짜기를 울려 몽글몽글 흰구름을 피어올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한다는 거네요.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그런 꾀꼬리의 꿈이 더 재앙스럽다(개구지다)고 합니다.

 

시인님도 이렇게 재앙스러운 봄의 꽃침을 맞아 몸 둘 바를 모르는 봄날 저녁이네요. 황홀한 꽃침을 날려 만물을 깨워 활짝 피우는 봄은 이렇게 만물에게,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재앙스럽네요. 참으로 짓궂네요. 온몸 온마음 간질거리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영랑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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