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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간판 없는 거리

by 빗방울이네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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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간판 없는 거리'를 만납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인님의 맑고 뜨거운 영혼을 만날 수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간판(看板) 없는 거리' 읽기

 

간판(看板) 없는 거리

 

윤동주(1917~1945,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정거장(停車場) 푸랱폼에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나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사람들

다들, 어진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2002년) 중에서

 

2.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간의 시

 

윤동주 시인님의 시 '간판(看板)이 없는 거리'의 원본에 보니 시의 맨 끝에 1941년이라고 적혀 있네요. 이 시가 탄생한 연도입니다.

 

이 때는 시인님 25세로 연희전문 4학년 때입니다. 일제강점기입니다. 

 

시인님은 전시(戰時)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이 해 12월에 연희전문을 졸업해야 했을 정도로 이 시기는 긴박하던 시기입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12월에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일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시가 쓰인 시기는 이렇게 일제 군벌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네요. 전쟁에 끌려가야 하는 징병의 공포, 한글말살, 창씨개명 등으로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 우리 민족의 가슴을 옥죄던 시간입니다.

 

이 제목 '간판 없는 거리'란 어떤 거리를 말할까요?

 

이 제목은 중의(重義)적인 장치인 것 같습니다.

 

우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자신의 나라이름(간판)을 잃고 망한 나라라는 의미가 떠오르네요.

 

그렇게 나라를 빼앗겨 진정한 주인(간판)을 잃은 나라라는 의미도 따라오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하기 어렵던 시가 조금씩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 시를 만나봅니다.

 

'정거장(停車場) 푸랱폼에 /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 집 찾을 근심이 없어'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황량한 풍경이네요.

 

2연의 '다들 손님들뿐'이라는 구절로 보아 '아무도 없어'라는 구절은 '주인'이 없다는 말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욱 황량한 느낌입니다.

 

이 시절의 주역은 어디나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님은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주인은 '아무도' 없다고 하네요. 참으로 가슴이 아픈 장면입니다.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나라의 주인이던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고 주인에서 자기 나라의 손님으로 전락하고 말았네요.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나라의 간판을 잃었기 때문에 집집마다에도 간판이 없다고 합니다. 이때의 간판도 주인으로 새겨봅니다.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나라의 주인 자리도 잃고, 집집마다 주인 자리도 빼앗긴 시대입니다. 잃어버린 '집'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시간이네요.

 

이 구절은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과 연결되어 일제의 폭압에 억눌린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시인님의 슬픔의 탄식이 느껴지는 구절이네요.

 

"다들-손님들뿐-손님-같은-사람들뿐"-윤동주-시-'간판-없는-거리'-중에서.
"다들 손님들 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 윤동주 시 '간판 없는 거리' 중에서.

 

3. 겨울을 뚫고 봄은 온다는 확신, 그리고 각오

 

'빨갛게 / 파랗게 /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뜻을 마음껏 제대로 펼 수 없는 시간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얼마나 억압과 통제가 극에 달했으면 그랬을까요? 강제로 우리의 글을 빼앗기고 우리의 입이 닫히고 우리의 글이 멈추어졌던 통한의 시간입니다.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와사(瓦斯)는 가스를 말하는데, 와사등은 도시의 가로등입니다.

 

그렇게 와사등을 모퉁이마다 밝혀 놓았네요. '자애로운 헌 와사등'이라고 합니다.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해 마치 유랑하는 손님이 되어버린 민족입니다. 몸과 마음을 기댈 데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렇게 깊은 고독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켜놓은 자애로운 불빛이네요. 그 희망의 불빛, 사랑의 불빛에 기대어 저마다의 차가워진 몸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데웠을까요?

 

'손목을 잡으면 /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이 구절에서 시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와사등에 불을 켜놓은 사람들, 고독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시인님의 연민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씩이나 '어진 사람들'이라고 불렀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그런 어진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터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말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비분의 토로일까요?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을 희망적으로 읽고 싶습니다. 끊임없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해 온 윤동주 시인님도 결코 절망에 항복하거나 주저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지금은 겨울이지만 봄이 온다는 믿음으로 새깁니다.

 

시인님은 언젠가 이 암울한 현실도 반드시 끝이 날 것을 갈망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시인님은 시를 마무리하면서 그 암울한 시대에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며 주먹을 힘껏 쥐었을 것만 같습니다.

 

'다를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이 시를 다 읽고 나니 이 구절에 마음에 가라앉습니다. 이 시대를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느냐고 시인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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