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님의 시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를 만납니다. 개나리꽃을 보면 생각나는 시, 세상의 꽃을 다시 보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안도현 시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읽기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안도현(1961년~ , 경북 예천)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안도현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년 1쇄 1999년 23쇄) 중에서
2. 만취해 꽃가지 꺾어든 시인님 좀 보셔요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시인님은 친구들과 밖에서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였는지 대취(大醉)한 것 같습니다.
개나리꽃 만발한 이 봄날 저녁에 어찌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지요.
세상의 가지마다 연두 물이 촉촉이 오르고요,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스멀스멀 봄물이 오르는데요
그렇게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오는 시인님은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길가 화단에 개나리꽃은 예쁘게 피었고요, 시인님의 발걸음은 갈 짓자로 자꾸 비틀거리고요.
'너무 예쁘게 피어' 있던 '개나리꽃 한 가지' 휙 꺾었다고 합니다.
'개나리꽃 한 가지 꺾어 들고는' 하는 시인님 행동 좀 보셔요.
그 작고 노란 개나리꽃잎마다 뽀뽀를 했다고 하네요. 그것도 쪽, 쪽요. 거참.
개나리꽃잎이 시인님의 어린 딸 입술 같았다네요.
얼마나 귀여웠으면요.
'웬걸 /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 간밤에 저질러버린 /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 그만 보고 말았지요'
아침에 사단(事端)이 환하게 드러났네요.
만취한 상태로 자신이 '간밤에 저질러버린'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네요.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처럼 흩어져 있는 개나리꽃잎을 발견한 시인님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맙소사, 시인님은 어젯밤 저지른 행위를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라고 했네요.
시인님, 개나리꽃가지 하나 꺾은 걸 가지고 어찌 그리 자신을 엄하게 꾸짖으시는지요?
그저 개나리꽃가지 하나인걸요.
3.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개나리야 / 개나리야 /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시인님은 개나리꽃가지 하나를 꺾은 자신이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라고 자책하네요.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그런 자신을 '인간도 아니다'라고 하네요.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단호히 말하네요.
개나리꽃가지 하나 꺾은 자신이 인간도 아니라고요.
하. 우리는 이런 시인님을 어떻게 할까요?
'개나리야 개나리야'라고 부르며 미안해하는 시인님을 어떻게 할까요?
개나리꽃가지 하나 꺾고 힘들어하는 이 여리디 여리고 순하디 순한 노루 같은 시인님을 어떻게 할까요?
시인님은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추운 개나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개나리는 꽃눈을 꾹 감고 얼마나 봄을 애타게 기다렸을까요?
시인님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보들보들해진 대지의 기운을 받아 봄물을 힘껏 당겨 꽃을 내밀었을 개나리를요.
그렇게 샛노란 꽃이 핀 기다란 가지를 바람에 흔들며 벌과 나비를 기다리고 있었을 개나리를요.
그런 개나리꽃가지를 휙 꺾고 말았으니요.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느니요.
시인님은 그래서 자신을 '인간도 아니다'라고 자책하고 있네요.
너는 어떻게 개나리의 자식 같은 개나리꽃가지를 그렇게 함부로 꺾을 수 있단 말인가!
너는 네 자식만 소중히 하면 된단 말인가!
이렇게 슬퍼하며 탄식하는 시인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그러면서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라는, 임희숙 가수님의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노랫말 한 구절을 제목으로 따와서 시로 남겼네요.
그런데요, 시인님은 왜 그랬을까요?
왜 이렇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을 만천하에 공개해서 스스로 길이길이 부끄러워하고 있을까요?
'온갖생명사랑청', 그런 관청이 있다면요, 이 시는 '온갖생명사랑청'에서 벌이는 캠페인인 것만 같습니다.
제발 개나리를 꺾지 마시오! 제발 꽃을 꺾지 마시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콧방귀를 뀌겠는지요.
그래서 시인님이 자청해서 이렇게 멋진 시를 써서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앞서서 말려주는 거네요.
우리는 얼마나 여리디 여리고 순하디 순한 노루 같은 시인님처럼 살아야겠는지요?
길가의 작은 생명이라도 얼마나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생명으로 알고 살아야겠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안도현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국영 월량대표아적심 (115) | 2024.03.31 |
---|---|
김상옥 시조 사향 (120) | 2024.03.30 |
백석 시 노루 (114) | 2024.03.28 |
국선도 호흡법 깊은 숨쉬기를 해야하는 까닭 (116) | 2024.03.27 |
교언영색(巧言令色) 뜻 (103) | 2024.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