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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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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님의 시 ‘가을의 소원’을 들어봅니다. 시인님은 가을에 무얼 하고 싶다고 할까요? 그대는 뭘 하고 싶은가요? 시인님이 챙겨주신 ‘가을의 버킷리스트’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읽기


가을의 소원
 
- 안도현(1961~ , 경북 예천)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8년) 중에서

2. 소낙비에 흠씬 두들겨 맞은 적 있나요?


안도현 시인님의 시 ‘가을의 소원’은 시인님이 가을에 하고 싶은 9가지 소원 목록이네요. 가을의 버킷리스트네요. 그대는 이 중에서 어느 것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빗방울이네는 이거요.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지난여름에 소낙비를 맞은 적이 있거던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난 적이 있나요? 처음에는 안 젖으려고 뛰었답니다. 그런데 뛴다고 안 젖을 수 있나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체념하게 되네요. ‘에라, 모르겠다’는 마법의 문장이네요. 자연의 큰 몸속에 나의 작은 몸을 풍덩 담그는 기분! 얼마나 편하던지요. 비가 오면 비에 젖고! 이렇게 체념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동안 무얼 두려워했던 걸까요? 내 좋은 옷이 젖는 것? 비메이커 신발이 젖는 것? 양말까지 속옷까지 젖는 것? 젖어서 축축해지는 것? 나의 짝지 풀잎에게 야단맞는 것?

이리 꼽아보니 참으로 소소한 것들을 두려워했네요. ‘소낙비 흠씬’ 젖고 보니, 아니 시인님의 표현대로 ‘소박비 흠씬’ 두들겨 맞고 보니 빗방울이네가 두려워했던 것이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소낙비 회초리’의 힘! 우리는 얼마나 미미한 것들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햇빛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시인님의 9가지 ‘가을의 소원’ 중 이 목록도 눈에 확 들어오네요. 참말로, 시인님 상상력 좀 보셔요. ‘햇빛이 슬어놓은’. 여기에 그냥 눈이 딱 붙어버리네요. 빗방울이네는 이 의미를 ‘햇빛이 깔기어 놓은’으로 새기렵니다. ‘슬어놓은’ → ‘슬다’를 벌레나 물고기 따위가 알을 깔기어 놓다는 의미로 읽으면 이 구절은 얼마나 환상적인 동화의 한 장면 같은지요.

마당에 말려놓은 나락(벼)에서 나는 냄새를 맡은 적이 있나요? 오래전에 맡은 적이 있는데 냄새의 기억이 희미하네요. 옛사람의 옷에서 나는 어떤 깊은 냄새 같을까요? 태양과 대지, 태풍과 소낙비에서 끌어모은, 봄에서 여름까지 고인 시간이 내는 냄새. 그 냄새가 햇빛을 받아 더 강해지고 있었네요. 그 냄새를 햇빛이 슬어놓은, 깔기어놓은 냄새라고 한 시인님 덕분에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냄새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그 신기한 냄새를 이번 가을에는 꼭 맡아보아야겠어요. 빗방울이네 가을 버킷리스트!

혼자 우는 것

-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이 ‘독서 목욕’에서 마음 목욕하셨지요, 정호승 시인님의 시 ‘선암사’로요. 그 시에서 정호승 시인님은 자신의 울음터로 선암사 해우소를 꼽았어요.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곳 말이에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요. 그대도 이런 곳이 있겠지요?

우리 삶은 얼마나 좌충우돌인지요? 그 전쟁터에서 우리 저마다 얼마나 많은 부상을 입었겠는지요?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영혼 이 가을까지 터벅터벅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암사 화장실이나 어디 외진 곳으로 갑시다. 거기 가서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 봅시다. 그러면 바닥 모를 설움이 울음으로 터지겠지요? 그 울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오로지 그대 내부로 흘러가 그대 맑디 맑게 씻겨지기를!

안도현시가을의소원중에서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3. 욕망의 문을 닫고, 다만 이 순간을 살아가기를!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가을의 문턱인 ‘처서’가 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지고, 풀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자연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네요. 여름 동안 기세등등 자라던 풀이 그런 속도로 기세등등 끊임없이 욕망한다면 어찌 되겠는지요?

우리도 모기나 풀과 같은 자연의 구성원이므로 더 이상 피 빨지 않는 모기가 되고 더 이상 키 크지 않는 풀이 되는 시간, 가을입니다.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시간, 가을이네요. 잠시 달리던 생활계획표에 포즈(pause) 단추를 누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시간, 가을이네요. 그 깊고 푸른 곳에 나를 담가보는 시간, 가을이네요.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안도현 시 ‘가을의 소원’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과거에 사는지요. ‘그땐 그랬지!’. 맞습니다, 그 과거의 힘으로 우리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에는 ‘초록’을 더 이상 호명하지 않기로 합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이기를 희망합니다. 초록의 시간에는 초록의 시간이 있었고, 단풍의 시간엔 소중한 단풍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겠습니다. 이 가을의 소원입니다. 먼 훗날 이 단풍의 시간을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도록 이 순간을 잘 살아가기를!

오늘 블친 ‘행복이’님이 빗방울이네에게 보내준 댓글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어요. ‘우울하다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며, 마음이 평화롭다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문장인지요. 그대 마음은 지금 평화로운지요?

그런데요, 시인님의 9가지 소원은 돈이 하나도 들지 않는 거네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네요. 이런 것이 소원이 되었네요. 우리는 얼마나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지, 시인님이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안도현 시인님의 시 ‘공양’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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