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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노루

by 빗방울이네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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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노루'를 만납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을 믿고 의지하며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노루' 읽기


노루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山곬에서는 집터를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아레서 노루고기를먹었다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노루'는 단 2줄입니다. 정말 짧은 시네요.

시집 「사슴」(1936년)에 실린 33편의 시 가운데 2줄짜리 시가 3편인데요, '노루'와 '비', '절간의 소 이야기'가 그들입니다.

이 시집은 모두 4부로 나뉘어 있어요. 1부는 '얼럭소새끼의영각', 2부는 '돌덜구의물', 3부는 '노루', 4부는 '국수당넘어'입니다.

보시다시피 시 '노루'가 3부의 제목이 되었네요.

3부에는 '청시' '산비' '쓸쓸한 길' '자류' '머루밤' '여승' '수라' '비' '노루' 등 모두 9편이 배치되어 있네요.

이 3부에 시 '노루'를 맨 마지막에 놓고, 3부의 표제로 한 것은 그만큼 시인님이 '노루'를 살갑게 여기는 시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시이기에 이렇게 시인님이 애지중지했을까요?

2. 집터를 마련하는 일은 어떤 마음으로 할까요?


'山곬에서는 집터를츠고 달궤를 닦고'

이 원본을 현대어에 가깝게 옮기면 이렇습니다.

'산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구를 닦고'
 
원본의 '츠고'는 '치다'의 방언입니다. 치다는 '하수구를 치다', '변소를 치다'와 같은 용례로 쓰입니다. 오물이나 잡동사니 같은 것을 치우는 것을 말하네요.

집터를 친다고 하니, 집 지을 터를 닦는 것을 말하겠네요.

산골이니까 산자락에 집을 지으려면 할 일이 많겠습니다. 집이 들어앉을 평지를 만들기 위해 나무나 풀을 베는 일부터 돌을 가려내고 땅을 고르고 평평하게 하는 일까지요.

원본의 '달궤'는 '달구'의 방언입니다. 달구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데 쓰이는 도구입니다. 무거운 돌이나 나무, 또는 쇠에 손잡이를 달아서 여럿이서 높이 들었다가 쿵 하고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땅이 단단하게 다져지겠네요. 이런 일을 달구질한다고 합니다. 

집터는 평평해야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단단해야겠는지요. 달구를 닦는다는 것은 집터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달구질을 한다는 의미겠습니다.

몇 사람이 붙어서 이 일을 하고 있을까요?

땅을 반듯한 평지로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전문가인 집 짓는 목수는 필수 인력이겠지요. 집주인도 물론 있고요, 이런 큰일을 품앗이해서 나누는 마을의 장정들도 두어 사람 있겠네요.

이 장정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노루고기를-먹었다"-백석-시-'노루'-중에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 백석 시 '노루' 중에서.

 

 

 

3.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으로 사는 순박한 삶의 이야기


새집을 짓는 일, 새로운 보금자리를 짓는 일은 얼마나 큰 기쁨일까요?

새집을 짓는 일의 시작, 그 터를 닦는 일입니다.

'터를 닦는다'라는 말은 '기도한다'라는 말이네요. 신성함이 물씬 풍깁니다.   

이 터가 부디 복된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이 집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아무 탈 없게 하소서.

이 집에는 불길한 일은 일절 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 집에는 사랑과 행복이 충만하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하면서 집터를 다졌겠지요?

'보름달아레서 노루고기를먹었다'

이 원본을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집터를 고르는 일은 며칠 걸릴 테니까 보름달을 헤아려 그전에 시작하나 봅니다.  

그러니 집터 고르는 일은 아무 날에나 시작하지 않겠네요.

집터를 다 고른 날에 보름달이 환하게 뜨는 날이 되도록 날을 맞추겠네요.

산골입니다. 햇볕 잘 들고 찬바람 피해줄 남향의 맞춤한 곳에 반반한 집터를 다 다졌습니다.

아직은 건물이 없는 평평한 평지네요.

거기 막 고른 집터에 장정들이 노루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대여섯 장정들이 맨땅에 빙 둘러앉았겠지요.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는 행위는 기도의 행위이겠습니다.

성스러운 제의(祭儀)의 시간이겠습니다. 

'노루고기를 먹었다'.

문득 '노루잠'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네요. 자주 깨는 잠입니다. 그만큼 노루는 자신이 너무 약하고 순해서 조그만 기척에도 놀라는 예민한 동물이네요.

'노루잡이'도 생각나네요. 야산의 노루를 한쪽으로 몰아서 잡는 노루잡이요. 노루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까웠던 동물인지 느껴지네요.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도요. 선녀와 나뭇꾼을 부부로 맺어준 착한 노루 말예요.

이처럼 예부터 노루는 사람과 가까이 있었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신비한 동물로 여겨졌네요.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복을 달라고 보름달에게 고하는 시간입니다.

좋은 기운을 가득 품은 보름달에게 안녕(安寧)을 비는 시간요.

이렇게 집터를 완성해낸 땅의 사람과 하늘의 보름달을 이어주는 매개는 노루입니다.

그래서 시 제목이 '노루'가 되었을 텐데요, 이렇게 산골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복되게 해주는 이 노루는 얼마나 고맙고 영물스러운 동물인지요.

노루의 힘과 보름달의 힘은 자연의 힘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을 믿고 의지하고 순응하며 복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산골사람들의 순박한 삶이 물씬 느껴지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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