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로 시인님의 시 '논개'를 만납니다.
논개의 마음과 시인님의 마음을 떠올리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변영로 시 '논개' 읽기
논개(論介)
변영로(1898~1961, 서울)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 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전작(全作) 시집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정음사, 1983년) 중에서
2. 25세 청년 변영로의 비분(悲憤)이 담긴 시
변영로 시인님의 대표작이자 우리 근대시 대표작의 하나인 '논개'는 1923년 「신생활」을 통해 처음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5세 때네요.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이 시에 등장한 논개는 실존인물입니다.
논개는 임진왜란(1592~1597년) 때 경남 진주 촉석루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일본 장수(게다니무라 로꾸스께)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날려 순국한 의기(義妓)입니다.
논개가 남강에 몸을 던진 330여 년이 지난 1923년 시 '논개'가 써졌네요.
왜 1920년대에 1590년대의 논개가 불려 나왔을까요?
이 때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누구보다 민족애 정신이 강한 시를 발표했던 25세 청년 변영로 시인님의 심정이 담긴 시가 바로 '논개'인 것입니다.
시인님은 330년 전의 논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아이콘'인 논개를 호명하며, 그가 죽음으로 지켜낸 조국을 다시 일제에 빼앗겨버린 비분(悲憤)을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는 1924년 시인님의 시집 「조선의 마음」에 실렸는데, 시 '논개'가 실린 시집 「조선의 마음」은 일제로부터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를 떠올리며 시로 들어가 봅니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情熱)은 / 사랑 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이 구절을 읽고 눈을 감으면 푸른색과 붉은색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두 가지 색이 대비되면서 푸른색은 더 푸르지고 붉은색은 더 붉어집니다.
붉은색('불붙는 정열')은 논개의 붉은 마음, 바로 '단심(丹心)'입니다. 이때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물론 민족애일 것입니다.
푸른색('푸른 그 물결')은 푸른 역사입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진주 남강의 물결처럼 푸릇푸릇 이어질 강물 같은 민족의 맥박입니다.
역사나 애국심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이렇게 색깔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의 매력이기도 하네요.
분노가 거룩하다는 표현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노가 종교보다 깊다는 표현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는 이 생경한 구절에서 왜적에 대한 논개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그것은 돌발적인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얼마나 깊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지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인식은 남강에 몸을 던지기 직전 논개의 마음에 '접속'된 변영로 시인님의 뜨거운 마음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그 시인님의 그 마음에 '접속'된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기도 하겠지요?
3. 가장 극적인 구절 -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시인님은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뛰어드는 순간의 논개의 모습을 말입니다.
아니 시인님이 바로 논개가 되어, 논개의 심정이 되어, 시인님 스스로 죽음에 입 맞추기 직전의 심정인 것만 같네요.
'아리땁다'는 마음이나 몸가짐이 맵시 있고 곱다는 뜻, '아미(蛾眉)'는 누에나방(蛾)의 눈썹(眉)이라는 뜻으로 가늘고 길게 굽어진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이르는 말입니다.
왜장의 목을 끌어 안기 직전일까요? 논개의 아름다운 눈썹이 파르르 높게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이 시에서 가장 극적인 구절로 다가옵니다.
눈썹이 높게 흔들리고 있다는 표현 속에 죽음을 각오하고 남강의 강물을 응시하던 순간, 논개의 불처럼 타오르는 강렬한 분노와 죽음에 대한 굳은 결심이 들어 있네요.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이 죽음을 입 맞추었다고 합니다. 미인의 입술이 죽음을 '입 맞추었다(!)'라고 할 때의 이 마음은 얼마나 두려움 없는 마음이겠는지요?
이 강렬한 마음 역시 논개의 마음이자 일제 치하 고통 속에 살아가던 시인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흐르는 강(江) 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이 시의 결구에서 시인님은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와 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네요.
당시 시인님에게 330년 전의 인물이었던 논개입니다. 그를 향한 시인님의 마음은 붉디붉은 것만 같습니다.
25세 시인님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20대의 꽃다운 나이였을 논개입니다.
술자리에서 왜장을 시중드는 기생의 몸으로, 연약한 여인의 마음으로 그렇게 거룩한 결심을 결행한 논개를 생각하며 시인님은 논개처럼 일제 치하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정신의 숭고함이란 무엇일까?
- 짧디 짧은 인간의 삶을 영원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아래 구절은 시인님이 스스로에게 촉구하는 명령인 것만 같네요. 아니 우리에게 당부하는 말인 것만 같네요.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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