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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변영로 시 봄비 비둘기 발목만 불키는

by 빗방울이네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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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시인님의 시 '봄비'에 젖어봅니다. 겨우내 무뎌진 감각의 촉수를 섬세하게 되살려주는 시입니다. 함께 음미하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변영로 시 '봄비' 읽기

 
봄비
 
변영로(1898~1961, 서울)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 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변영로 전작(全作) 시집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김영민 엮음, 정음사, 1983년) 중에서 

 
변영로 시인님(1898~1961, 서울)은 우리나라 신시(新詩)에서 기교파의 선구적인 시인으로 꼽히며, 대표작 '논개'를 비롯 민족혼을 일깨우는 정서적인 시로 시단의 주목을 받은 시인입니다.
1918년 21세 때 「청춘」에 영시 'Cosmos'를 발표,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동인지 「폐허」(1920)와 「장미촌」(1921) 발행에 참여했고, 1924년 시집 「조선의 마음」을 비롯, 영문시집 「Grove of Azalea」, 수필집 「명정 사십 년」, 「수주 수상록」과 「수주 시문선」 등을 발간했습니다.
이화 여전,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48년 서울시문화상(문학) 등을 수상했습니다. 부천시 주관으로 그의 호(수주/樹州)를 딴 수주문학상이 제정, 운영되고 있습니다.
 

2.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로 시작되는 시 '논개', 기억하시죠?
 
오늘은 이 '논개'를 쓴 변영로 시인님의 시 '봄비'를 만납니다.
 
시 '봄비'는 '논개'와 함께 시인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독서목욕'에서 이 시를 위에 소개하면서 파란색 잉크로 표시한 부분이 있습니다.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 실 같이 내리는 봄비가 비둘기 발목만 '붉힌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봄비를 묘사한 수많은 다른 시의 구절 가운데서도 절창으로 꼽히면서 자주 회자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캐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봄비가 비둘기의 발목을 붉힌다', 이 구절에 어떤 다른 사연이 있는 걸까요? 
 
이 시는 시인님이 1922년 3월 「신생활」에 발표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지금(2024년)으로부터 102년 전의 시입니다.
 
102년 전에는 말의 쓰임새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독서목욕'이 그 원본을 찾아보았습니다.
 
원본에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을까요?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 속에 묶여있는, 변영로 시인님의 첫시집 「조선의 마음」을 찾아 시 '봄비'의 원본을 봅니다.

 

원본에 실린 해당 구절은 이랬습니다.
 
'다만비듥이발목만불키는銀실가튼봄비만니'
 
나중에 이 구절을 현대어로 바꾸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이렇게 변합니다.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그러니까 원본에는 '불키는'이었는데, 뒷날 누군가 이를 현대어로 바꾸면서 이 '불키는'이 '붉히는'으로 표기된 것입니다.
 
이 글의 모두에 소개된 시 '봄비'가 들어있는 변영로 시인님의 시집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은 시인님의 전작시집(全作詩集)입니다. 시인님의 시가 다 실린 시집이라는 말이네요.
 
이 전작시집이 나온 시기는 1983년입니다. 시인님(1961년 작고)의 사후(死後)입니다. 
 
과연 시인님이 생전에 표기한 '불키는'의 본래 뜻이, 사후에 바뀐 현대어 표기대로 '붉히는'이었을까요?   
 
'붉히는'은 형용사 '붉다'의 동사 표현입니다. 시인님은 '붉다'라는 색채의 의미를 다른 시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시인님의 시 '논개'에 그 구절이 나옵니다. 이 역시 시인님의 첫시집 「조선의 마음」에서 원본으로 봅니다.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우리가 아는 이 구절이 시 '논개'에서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원본의 첫째 연에서는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불근'으로, 나머지 둘째, 셋째 연에서는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원본에서 '꽃'의 'ㄲ'은 'ㅅㄱ'으로 표기됨).

 
세번 중 두번이나 '붉은'이라고 표기했다는 점에서 첫째 연의 '불근'은 '붉은'의 오타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이렇게 시 '논개'에서는 시인님은 '붉다'의 형용사 표기를 '붉은'이라고 바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붉은'이라는 색채 표기를 '붉은'으로 표기했는데, '불키는'에서는 처음부터 왜 '붉히는'으로 하지 않았을까요? 
 
'봄비'의 원문 '불키다'는 '붉히다'가 아닌 다른 의미일까요?
 
다시 그 구절을 봅니다.
 
'다만비듥이발목만불키는銀실가튼봄비만니'
 
봄비가 내리면서 비둘기는 바쁘게 되었습니다.
 
뜰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여유롭게 벌레를 잡으며 배를 채우던 비둘기였습니다. 
 
그런데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벌레들은 다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비둘기는 빗속에서 바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빗속에서 한동안 다니다 보면 어찌 되겠는지요? 
 
'비둘기 발목'이 퉁퉁 불지 않겠는지요? 누구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불키는'은 '물에 젖어 퉁퉁 불게 하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불다'는 '붇다'의 방언(함경)인데, 물에 불어서 부피가 커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봄비'의 '불키다'는 '불다'→'불게하다'→'불키다'로 전이된 음절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네요.
 
또 '불키다'는 표준어 표현도 있습니다. 그 뜻은 '부르트다' '살가죽이 들뜨고 그 속에 물이 괴다'입니다.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도, 시의 정상으로 가는 길도 여러 갈래입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목욕'이 낸 길로 가서, 102년 전 시인님이 처음에 쓰신 그대로의 '봄비'를 복원해 봅니다.
 
'다만비듥이발목만불키는銀실가튼봄비만니'
 
촉촉이 내리는 봄비 속에서 비에 젖어 퉁퉁 불은 발목으로 왔다 갔다 하는 비둘기가 눈앞에 선연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네요.
 

"비둘기-발목만-불키는"-변영로-시-'봄비'-중에서.
"비둘기 발목만 불키는" - 변영로 시 '봄비' 중에서.

 

 

 

 

 

 

 

3. 이처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비둘기 발목만 불키는'을 천천히 음미하고 나니, 어느덧 시 '봄비'가 마음속으로 쑤욱 들어와 우리를 촉촉이 적셔주는 것만 같네요.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보니 -'
 
이 2줄이 각 연마다 맨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인님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중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봄날, 밖에 어떤 기미가 느껴져 나가 봅니다. 그랬더니 밖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애타게 기다리는 무언가, 누군가는 오지 않고 '젖빛 구름만이'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라고 합니다.
 
'무척이나 가쁜 듯이'. 여기서 우리는 젖빛 구름이 무언가 일을 내겠다는 느낌이 드네요.
 
'젖빛 구름'.
 
이 구절 참 좋네요. 젖빛은 젖 빛깔이라는 뜻인데, 불투명한 흰빛 또는 부유스럼한 흰빛이겠지요.
 
'젖빛 구름'이 숨이 가쁜 걸 보니 비를 머금고 있는 중일까요?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아렴-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 같이 /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무언가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시인님은 또 나가보네요.
 
1연을 읽고 2연에 도착하면서 시인님의 마음이 되어버린 우리에게도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무뎌진 감각의 촉수들이 되살아나 섬세하게 밖을 향해 곤두서는 느낌이네요.
 
그래서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그러나 간곡하게 기다리는 무언가, 누군가는 또 오지 않았네요.
 
'떨리는' '꽃의 입김만이' 자지러진다고 합니다. 시집 「조선의 마음」에 실린 원본을 보니 '자탕'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그의 향기로운 자탕' → '그의 향기로운 자랑'

 

보이지는 않지만 후각을 통해 감지되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서 자지러진다고 하네요. 
 
'자지러지노나'는 원본에는 '자지러치노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자지러치노나'는 꽃 향기가 별안간 우리의 후각의 영역 안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움직임이 강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네요.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푸른 글자로 표기된 '노래도'는 '소리도'의 오기(誤記)로 새깁니다.
 
원본에는 '소래도'로 나오는데, 이 '소래'를 현대어로 바꾸면서 '노래'로 표기했네요.
 
이 '소래'는 '그윽하게부르는소래잇서'에도 나옵니다.
 
이를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로 표기했듯이, '소래도업시근심가티나리노나!'의 '소래'도 '노래'가 아니라 '소리'로 읽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래서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라!'는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로 바꿔 읽습니다.
 
자, 이제 시의 마지막 3연을 만납니다.
 
이 3연에서 시인님은 이 봄날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를 따라 세 번째 밖으로 나아갑니다. 
 
아, 이번에는 봄비가 오고 있었네요.
 
문제적 시구 '비둘기 발목만 불키는' 봄비가 오고 있었네요.
 
봄비가 '비둘기의 발목을 불킨다'라는 시인님의 생각은 얼마나 다정한지요? 
 
봄비는 가늘고 조용히 내리는 비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녹이는 은(銀)실처럼 귀한 비라고 합니다.
 
가늘고 조용히 내리는 봄비여서, 비둘기는 한 마리만 더, 한 마리만 더, 하면서 벌레를 찾고 있었을까요?
 
그러다가 발목이 퉁퉁 불고 말았을까요?
 
그러고 보니 1연과 2연은 3연의 가늘고 조용한 봄비가 오려는 전조(前兆)였네요. 
 
봄날, 자연의 미동(微動)의 기미(機微)를 이처럼 지극히 섬세하고 촘촘하게 감지하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시인님이네요.
 
일제강점기, 이런 감성의 시인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민족해방을 기다렸을까요?
 
이 봄날의 봄비 징후에 온 촉수를 세우고 있던 시인님은 봄비처럼 언젠가는 해방의 날도 오리라 믿었겠지요?
 
시인님 시 '봄비'를 음미하니, 그동안 무뎌졌던 우리네 더듬이도 조금씩 민감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봄비'로 몸과 마음의 더듬이를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봄비 시를 더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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