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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창의문외(彰義門外)

by 빗방울이네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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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창의문외(彰義門外)를 만납니다. 우리 삶의 영속성, 뭇 생명에 내재된 힘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창의문외(彰義門外)' 읽기

 
창의문외(彰義門外)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무이밭에 힌나뷔 나는 집 밤나무 머루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우물가에서 까치가 작고 즞거니 하면
붉은 숫닭이 높이 샛덤이 웋로 올랐다
텃밭가 재래종(在來種)의 임금(林檎)나무에는 이제도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고 히스무레한 꽃도 하나 둘 퓌여있다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시집  「사슴」에서 유일하게 서울을 스케치한 시

 
백석 시인님의 시 '창의문외(彰義門外)'는 시집 「사슴」에 실린 시 33편 중 유일하게 서울을 스케치한 시입니다.
 
제목 '창의문외(彰義門外)'는 창의문(彰義門) 밖(外)이라는 뜻이네요.
 
창의문은 옛 한양(서울) 도성(都城)의 8개 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양 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의 경계를 표시하며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는 동시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성(城)입니다.
 
그 성으로 드나드는 문이 모두 8개인데, 동대문과 동소문, 서대문과 서소문, 남대문과 남소문, 북대문과 북소문이 그것입니다.
 
창의문은 바로 북소문의 다른 이름입니다. 북쪽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라는 뜻.
 
백석 시인님은 어떻게 창의문에 가게 되었을까요?
 
시인님은 시집 「사슴」을 1936년에 펴냈는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23세 때인 1934년부터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편집일을 하고 있었던 시인님은 광화문에서 산보 삼아 걸어서 이 '창의문'까지 왔을까요?
 
1930년대 초기, 창의문 밖의 모습, 궁궐이 있던 도성 밖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무이밭에 힌나뷔 나는 집 밤나무 머루넝쿨 속에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무밭(무이밭)에 흰나비(힌나뷔)가 날고 있는 집이 있고요, 그 집 뜰에 밤나무 머루넝쿨이 있는데요, 키질하는 소리만이 들린다고 합니다.
 
가을 무였을까요? 하얀 무꽃에 하얀 나비의 날갯짓, 곡식을 까부느라 키질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키질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니 매우 고요한 시골의 풍경입니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즈음으로 여겨집니다.
 
옛 궁궐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적막하네요.
 
'우물가에서 까치가 작고 즞거니 하면 / 붉은 숫닭이 높이 샛덤이 웋로 올랐다'
 
까치가 자꾸(작고) 짖거니(즞거니) 하면 붉은 수탉(숫닭)이 높다란 샛덤이(장작더미) 위로(웋로) 날아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물가에 사람은 없고요, '우물가는 나의 것'이라고 까치와 수탉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기만 합니다.
 
'텃밭가 재래종(在來種)의 임금(林檎)나무에는 이제도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고 히스무레한 꽃도 하나 둘 퓌여있다'
 
이 4행은 정말 기차처럼 기다랗네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임금(林檎)은 보통 사과보다 훨씬 작은 사과가 열리는 능금나무입니다.
 
그렇게 열매가 작아서 성장도 느려 아주 천천히 굵어지는지 여태껏(이제도) 콩알만 하다고 하고요, 또 푸른 알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네요.
 
희스무레한(히스무레한) 꽃. 하얀 사과꽃이 하나 둘 피어 임금나무가 드문드문 허옇다고 하네요.
 
콩알만 한 푸른 알이 달렸다고 하는데 어떤 가지에는 희스무레한 꽃도 하나 둘 피어있다(퓌여있다)고 합니다.
 
빗방울이네와 친한 어느 대학의 조경팀장한테 물었더니, 이처럼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가지에는 꽃이 피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다른 가지보다 응달 진 곳에 있는 가지나 둥치에서 새로 난 가지에 말입니다. 
 
이런 임금나무의 성격은 너무 느긋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졸고 있다고 할까요?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오지항아리는 잿물(오짓물)을 입혀 구운 항아리인데, 표면에 검붉은 윤이 납니다.
 
돌담 기슭에는 장독대가 있네요.
 
오지항아리들이 옹기종기 앉아 가을 햇살을 받아 둥그런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풍경이네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장독 주인은 부지런하여 반들반들 장독을 닦아두었나 봅니다.
 
그 독에는 된장이나 간장이 들었겠지요? 그 독만 있으면 어느 집이라도 든든했을 시골마을의 풍경이 평화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요, 과연 이 시는 우리에게 무얼 말하고 있을까요?
 

"독이 빛난다" - 백석 시 '창의문외' 중에서.

 

 

 

3. 오지항아리의 찬란한 빛, 누가 앗아갈 수 있을까요?

 
빗방울이네도 지난 주말 서울 창의문에 가 보았습니다.
 
창의문 밖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창의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창의문만 말입니다.
 
창의문 출입구 천정에 봉황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어요. 닭머리를 한 봉황요.
 
이 닭머리 봉황 그림의 흥미로운 사연이 시 '창의문외(彰義門外)'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듯하네요.
 
옛 도성의 안쪽에서 창의문 출입구(닭머리 봉황 그림)를 지나 밖으로 걸어 나가니 멀리 인왕산이 펼쳐졌습니다.
 
창의문 안내소 관계자는 인왕산 앞 바위를 '기차머리 바위'라고 불렀어요.
 
인왕산 앞부분이 기차머리라고 불릴 만큼 인왕산은 옆으로 기다랗게 누워있었어요.
 
바로 지네의 형상입니다.
 
그런데요, 지네의 천적이 닭입니다.
 
지네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닭을 머리로 한 봉황을 출입구에 그렸네요.
 
지네의 기운이 궁궐로 들어와 왕조의 기운을 누를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입니다. 
 
창의문은 이런 이유 때문에 축조 이후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고 하네요.
 
도성의 8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닫힌 문이었네요.
 
그러니 창의문외(彰義門外), 즉 창의문 밖은 오랫동안 고요한 시골마을로 남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백석 시인님의 토속적 취향은 창의문 천정의 닭머리 봉황 그림이라는 모티브를 그냥 스쳐갈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인님이 시 '창의문외(彰義門外)'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창의문을 닫은 것은 민생(民生)을 위한 것이기보다 왕가(王家)의 편안을 위한 주술적 행위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네 민초들의 삶은, 또한 뭇 생명들은 왕가의 주술적 믿음과는 관계없이 푸릇푸릇 일어나고 있었네요.
 
무밭에 흰나비가 날고요, 키질하는 소리가 들리고요, 까치와 수탉은 영역다툼을 하고요, 사과는 아주 천천히 익어가고요.
 
'돌담 기슭에 오지항아리 독이 빛난다'
 
이렇게 장독대에는 맛있게 든든하게 장이 익어가고요.
 
창의문 안쪽은 살벌한 권력 쟁투, 창의문 밖은 평화로운 적막입니다.  
 
이 창의문 밖 뭇 생명들의 평화로운 적막을 누가 앗아갈 수 있겠는지요?
 
오지항아리의 저 찬란한 빛을 말입니다.
 
PS. 창의문 밖 부암동은 도심인데도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은 서울의 청정지대로 불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창의문 밖으로 나가니 '백석동길'이라는 도로표지판이 보입니다.
이 도로표지판을 보니 백석 시인님이 여전히 창의문 밖을 서성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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