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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프랜시스 잠 시 식당

by 빗방울이네 202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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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잠 시인님의 시 '식당'을 만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낮추어주고 비워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프랜시스 잠 시 '식당' 읽기

 
식당
 
프랜시스 잠(Francis Jammes, 1868~1938, 프랑스)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
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
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그 속에는 밀랍, 잼,
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
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므 씨, 어떠시오?"하고 물을 때
그가 살아 있는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떠오르지요.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장석주 엮음, 북오션, 2017년) 중에서.
 
프랜시스 잠 시인님(Francis Jammes, 1868~1938, 프랑스)은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1898년 첫 시집 「새벽의 삼종기도에서 저녁의 삼종기도까지」를 펴낸 것을 비롯 「그리스도교의 농목시」 「시편」 「시인의 탄생」 「앵초의 비탄」 「묘비명」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미 문학 대상, 프랑스 아카데미 오말 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빛바랜 그릇장'이 다 듣고 있다는 말!

 
백석 시인님과 윤동주 시인님 모두 좋아한 시인님이 바로 프랜시스 잠입니다.
 
백석 시인님은 하늘이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윤동주 시인님은 '나의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고 하면서, 그 아름다운 말 한마디에 '푸랑시스·짬' 시인님의 이름을 넣었네요.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푸랑시스·짬」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윤동주 시 '별 헤는 밤' 중에서
 
이 두 편의 시에 다 등장하는 것을 보니, 프랜시스 잠 시인님이 어떤 시를 썼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뭇 생명을 낮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는 시를 남긴 프랜시스 잠 시인님을 두 시인님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오늘 만나는 시 '식당'도 우리를 '낮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주네요.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 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그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사물이 그대 목소리를, 그대 행동을 다 듣고 보고 있다는 생각요.
 
그대 식구와 친구들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탁자 옆에 놓인 '빛바랜 그릇장'이 그대의 목소리, 그대 식구의 목소리, 그대 친구의 목소리를 다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인지할 수 있는 것만 인지하는 우리는 세상의 털끝만큼만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시인님은 '빛바랜 그릇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빛바랜 그릇장'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 구절들을 읽었을 때, 얼마 전 푸바오를 중국으로 보내던 강바오(강철원 사육사 별칭) 님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 걱정을 해주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푸바오를 위했듯, 푸바오도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 무슨 동물이? 그러실 수 있겠지만, 저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퀴즈 인터뷰 중에서
 
시인님의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와 강바오 님의 '저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는 다른 문장 같은 뜻이네요.
 
그대에게도 이렇게 그대의 말소리를 듣는 사물이 있겠지요? 그대가 그렇게 믿고 있는 사물요. 누가 뭐라 하든지 말입니다.
 
'빛바랜 그릇장'이 우리 목소리를 다 듣고 있다는 말은 우리의 들뜬 정신을, 우리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삐 풀린 정신을 얼마나 낮게 낮게 가라앉혀주는지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 /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
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 / 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뻐꾸기시계'가 더 이상 울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말입니다.
 
이 말은, 고장 난 '뻐꾸기시계'를 그저 고장 난 '뻐꾸기시계'로 여겨왔던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네요.
 
'뻐꾸기시계'가 죽었다(!)라고 여기는 시인님이라면 사물에 대해 얼마나 다정다감한 시인님이겠는지요?
 
'뻐꾸기시계'만이 아니라 의자도, 독서대도, 액자도, 빗도 모두 시인님과 함께 '살아있는(!)' 존재였을 테니까요.
 

"이-물건들의-작은-영혼들"-프랜시스-잠-시 -'식당'-중에서.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 - 프랜시스 잠 시 '식당' 중에서.

 

 

 

3.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라는 말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 그 속에는 밀랍, 잼 / 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 / 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낡은 찬장'도 살아있네요.
 
그래서 '낡은 찬장'에서 가족 중 누가 양초나 잼을 꺼내가고 누가 고기나 빵이나 배를 꺼내가는지 '낡은 찬장'은 다 알고 있다고 하네요.
 
'낡은 찬장'이 이렇게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님 식구들이 알고 있으니 누가 어떤 물건을 훔쳐갈 수나 있겠는지요?
 
그야말로 '낡은 찬장'은 이 집의 '충직한 청지기'이네요.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 "잠므 씨, 어떠시오?"하고 물을 때
그가 살아 있는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떠오르지요'
 
'이 물건들'에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지요!
 
스피노자 님의 저서 「에티카」의 이 한 구절은 우리를 깊은 사유의 골짜기로 데려가주네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물체나 개물의 관념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에티카/지성교정론」(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5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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