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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흰 그림자

by 빗방울이네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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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흰 그림자'를 만납니다. 나를 성찰하고 참다운 나를 찾아 신념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다짐의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흰 그림자' 읽기

 
흰 그림자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명동촌)
 
황혼(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黃昏)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2002년) 중에서
 

2. 유학길에 처음 쓴 자기 통찰의 시

 
이 시의 맨 마지막에 시가 쓰인 날짜가 있습니다. 1942년 4월 14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님이 일본 도쿄에 있는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4월 2일)한 지 12일 후네요.
 
시인님은 일본 유학시절 이 시 '흰 그림자'를 비롯 모두 5편의 시를 썼습니다.
 
이 시편들이 윤동주 시인님이 이 땅에 남긴 마지막 시였습니다.
 
시인님은 과연 먼 이국(異國) 땅에서 도착, 막 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때 시인님의 내면이 담긴 시가 바로 '흰 그림자'이겠네요.
 
그런데요, 그림자는 모두 검을 텐데, '흰 그림자'라니요.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이긴 한데 검은 그림자가 아닌 흰 그림자라고 하네요.
 
눈에 보이는 검은 그림자에 비해 흰 그림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이라는 뜻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은 내면의 자신을 말하겠네요.
 
내면의 자신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한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수시로 출몰하는 내면의 나는 얼마나 나를 혼란으로 빠뜨리는 존재인지요.
 
흰 그림자는 막막한 현실에서 온갖 번뇌로 너덜너덜해진 시인님의 분신, 분열된 자아이겠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흰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요? 아주 많지 않은가요?
 
'황혼(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 나는 총명했든가요'
 
'황혼'. 황혼은 하루가 저문 시각, 또는 현실의 암울함이 더욱 짙어지는 시간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런 황혼의 시각에 이르면 우리의 시선은 그제야 내면을 향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네요.
 
시인님은 자신의 귀를 '하루종일(하로종일) 시들은 귀'라고 하네요.
 
현상적 소리에 파묻혀 일상에 지친 귀입니다.
 
이런 귀는 '땅검(땅거미)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일 것입니다.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는 황혼녘 어스레한 땅거미가 점점 짙어지는 것, 바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형상을 말하는데요, 정말 절묘한 표현이네요.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시간이 지나는 소리, 즉 삶의 순간순간을 명확히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인님은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해야 할 스스로의 본분을 정확히 인지하며 살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 총명하지 못했다는 자성으로 들립니다.
 
문득 나의 귀는 어떤 귀일까, 돌아보게 되네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시인님은 어리석게도 이제야, 뒤늦게야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걸까요? 내 속에 수많은 내가, 괴로워하던 수많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네요.
 
우리는 이렇게 나를 정리 정돈하며 살고 있는가요?
 
참다운 나와 참나를 둘러싼 허상 같은 나를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요?
 
보통은 그 참다운 나와 허상들의 총체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범인(凡人)들의 존재 인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와 허깨비 같은 나를 뒤늦게야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나라고 여겼던 그 허상들이 오랜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 허상들, 나의 '흰 그림자'들은 더 이상 나에게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상들에 좌우되던 지난날의 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자신의 '흰 그림자'를 연연했다고 합니다.
 
허상에 잠식당한 채 허상이 자기인 줄 알고 집착하고 미련을 가졌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네요.
 

"흰 그림자들" - 윤동주 시 '흰 그림자' 중에서.

 

 

3. 참자아를 믿고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 황혼(黃昏)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그렇게 '흰 그림자들'을 모두 버리고 참다운 자아를 회복한 후의 나는 괴로움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양(羊)'은 깨끗함의 상징이네요. 권세나 부(富) 같은 세속의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상징 말입니다.
 
양(羊)이라도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이라고 하네요.
 
'신념(信念)'은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자신(참자아)을 굳게 믿는다는 걸까요?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를 돌려보내버린, 세태에 흔들리지 않을 굳센 '나'를 믿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내 앞에 주어진 일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다가오네요.

번뇌를 벗어버린 참자아의 행위, 자유롭고 담담한 자아의 행위는 참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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