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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by 빗방울이네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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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님의 시 '3'을 만납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입니다. 광대무변한 하늘이 나의 내부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영랑 시 '3' 읽기

 

3

 

김영랑(본명 김윤식, 1903~1950, 전남 강진)

 

어덕에 바로누어

아슬한 푸른하날 뜻업시 바래다가

나는 이젓습네 눈물도는 노래를

그하날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몸이 서러운줄 어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우슴 한때라도 업드라냐

아슬한 하날아래 귀여운맘 질기운맘

내눈은 감기엿대 감기엿대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 「영랑시집(永郞詩集)」(김영랑 지음, 문학사상사 엮음) 중에서.

 

2. 텅 빈 마음으로 아득히 먼 하늘을 보는 시간

 

김영랑 시인님의 시 '3', 즉 '언덕에 바로 누워'를 원본으로 만납니다.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에서 「영랑시집(永郞詩集)」을 펼쳐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는 이 시집의 세 번째 시로 배치되어 있네요.

 

이 시집에는 모두 53편의 시가 실렸는데, 모든 시에 제목이 없습니다. 시마다 숫자가 매겨져 있습니다. 세번째 시인 '언덕에 바로 누워'는 제목 자리에 숫자 '3'이 적혀 있고요.

 

시집 맨 뒤쪽을 펼쳐 판권을 봅니다.

 

'김윤식(金允植) 저(著) 영랑시집(永郞詩集)'이라는 글자가 맨 앞줄에 고딕체로 뚜렷이 인쇄되어 있네요.

 

발행일은 소화 10년 11월 5일입니다. 1935년이네요. 발행처는 「시문학사(시詩文學社)」, 발행 정가는 1원(壹圓)이네요.

 

이 시대는 일제강점기입니다. 시인님 33세 즈음이고요.

 

3번 시, '언덕에 바로 누워'는 어떤 시일까요?

 

'어덕에 바로누어 / 아슬한 푸른하날 뜻업시 바래다가'

 

'어덕'(언덕의 방언)에 바로 누웠다고 합니다. 왜 '바로' 누웠다고 할까요? 등을 언덕에 대고 하늘 쪽을 보며 누었다는 의미겠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뜻 '거짓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함께 느끼면서 읽으니 시가 한층 깊숙이 들어오네요.

 

거짓과 꾸밈없는 마음으로 하늘을 직시하며 언덕에 누웠다는 의미로 새겨봅니다.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끝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네요. 

 

'뜻 없이'. '뜻'은 '무엇을 하겠다고 속으로 먹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 마음 없이 아슬하게 높고 푸른 하늘을 바란다고 합니다.

 

'바래다가'. 이 구절의 어원은 '바라다'로 새깁니다. '바라다'는 '생각이나 바람대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다'의 뜻, 그리고 '어떤 것을 향하여 보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새깁니다.

 

무엇을 하겠다고 속으로 먹는 마음 없이, 텅 빈 마음으로 아득히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네요.

 

이런 시간은 자아를 성찰하는 소중한 시간일 것입니다.

 

'나는 이젓습네 눈물도는 노래를 / 그하날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눈물 도는 노래'는 세상사 살면서 겪은 서러운 일들이겠지요. 그런 서러운 일들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하늘이 너무도 아슬해서 세상 서러움 다 잊었다는 말이네요.

 

아슬히 먼 높고 높은 하늘입니다. 그 아슬히 먼 높고 높은 하늘의 눈으로 자신을 보네요.

 

그런 하늘의 눈으로 보는 자신은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 한 톨 만한 자신이겠네요.

 

하늘의 무한함과 자신의 유한함이 겹쳐졌으니 세상사 서러운 일들이야 너무나 미미하여 잊히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아슬히 높고 푸른 하늘이 시인님의 서러움을 씻어주었네요.

 

"그-하늘-아슬하여-너무도-아슬하여"-김영랑-시-'언덕에-바로-누워'-중에서.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 김영랑 시 '언덕에 바로 누워' 중에서.

 

 

3. 천진(天眞)한 마음이 있음을 깨닫는 시간

 

'이몸이 서러운줄 어덕이야 아시련만 / 마음의 가는우슴 한때라도 업드라냐'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얼마나 자주 이 언덕을 찾아왔을까요? 세상 서러운 일 겪을 때마다 말입니다. 그때마다 바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겠네요. 그러니 언덕은 시인님의 서러움 속속들이 다 알겠지요?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시인님은 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에 '가는 웃음'을 발견하네요. 아주 가느다란 웃음요. 웃음의 씨앗 말입니다.

 

어찌 너는 서러움 덩이이기만 하겠느냐, 네 마음에 가는 웃음이 한때라도 없더란 말이냐! 이렇게 하늘이 시인님에게 묻는 것만 같네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은 하늘의 힘으로 서러움을 씻고 마음속에 있는 '가는 웃음'을 찾아냈습니다.

 

서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시인님, 아슬히 높고 푸른 하늘을 보고 난 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아슬한 하날아래 귀여운맘 질기운맘 / 내눈은 감기엿대 감기엿대'

 

'천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진(天眞)'은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자연 그대로 깨끗하고 순진하다'라는 뜻입니다. '眞'은 '참, 진리, 본성, 본질' 등의 뜻입니다. 그러니 '천진(天眞)'에는 '하늘의 본성'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네요.

 

그러므로 '하늘의 본성'이란,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자연 그대로 깨끗하고 순진한 것'이네요.

 

우리가 아이의 마음을 표현할 때 '천진난만(天眞爛漫)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천진(天眞)함이 넘친다는 뜻이네요. 조금도 꾸밈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된 마음이네요.

 

이로써 이 구절이 우리 가슴에 쑥 들어옵니다.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즐거운 맘'. 

 

언어는 시대에 따라 쓰임새가 변합니다. 이 시대의 '귀여운 맘'으로 1935년의 '귀여운 맘'을 읽으면 시 속의 '귀여운 맘'은 어색해지고 맙니다. '귀엽다'의 뜻,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에서 '사랑스럽다'에 방점을 두고 '귀여운 맘'을 음미해봅니다. '질기다'는 '즐기다'의 방언입니다. 그래서 '질기운 맘'은 '즐거운 맘'으로 새깁니다.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즐거운 맘'. 바로 이 마음은 아이의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마음이네요. 하늘로부터 받은 원래의 마음, 천진한 마음 말입니다.

 

시인님은 서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언덕에 다시 와 바로 누워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풍진(風塵)에 서러워진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슬히 높고 푸른 하늘을 고요히 바라보다 자신에게 그 아슬하고 푸른 하늘이 준 '천진(天眞)'이 있다는 것을, 나아가 그 아슬하고 푸른 하늘이 자신의 본체(本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하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지금까지 잊고 또는 모르고 살았지만 나에게 그런 멋진 하늘이 들어있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내 눈은 감기었데 감기었데'. 그런 성찰이라면 어찌 눈이 감기지 않겠는지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말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영랑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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