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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영랑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by 빗방울이네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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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님의 시 '2'를 만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읽고 나면, 맑고 깨끗한 샘물에 몸과 마음을 담근 듯 개운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영랑 시 '2' 읽기

 
2
 
- 김영랑(본명 김윤식, 1903~1950, 전남 강진 출생)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늘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詩의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 초판본 「永郞詩集」(김윤식 지음, 시문학사 발행, 1935년) 중에서

 

2. 첫 시집 「영랑시집」의 두 번째 시 

 
김영랑 시인님은 1935년 낸 첫 시집 「영랑시집」에서 53편의 시를 실었는데 모두 제목 없이 시의 배열 순서대로 번호를 1~53번까지 매겨두었습니다.
 
오늘 만나는 시 '2'는 「영랑시집」의 두 번째 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 첫 시집의 1번 시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입니다.
 
첫 시집에 실린 53편 모두 소중하지만,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시집의 1, 2번 자리에 배치할 정도로 소중히 아낀 시인님의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이 시는 「영랑시집」에 실리기 앞서 1930년 「시문학」 2호에 발표되었는데 그때는 제목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였습니다.
 
시인님의 호흡을 느껴보기 위해 시집에 실린 1935년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시를 만나봅니다. 위의 시를 보면서, 시 가운데 옛말로 쓰인 구절 몇 개를 먼저 만나봅니다.
 
'속삭이는'을 '소색이는'이라 했네요. '소색이는'이 어쩐지 '속삭이는'보다 더 귀에 가까이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듯한 정다운 느낌이 들고요, '고흔봄'은 '고운봄'보다 더 예스럽게 고운 느낌이랄까요?
 
'붓그럼가치'는 또 어떤지요? '부끄럼같이'인데, 그보다 어쩐지 더 여린 느낌이 드는 부끄럼이 전해지는 것만 같고요. '살프시'도 '살포시'보다 더 포근하게 살며시 일어나는 느낌이고요. 이렇게 옛말이 주는 색다른 뉘앙스를 만끽하면서 시로 들어갑니다.
 

"오늘하루하늘을"-김영랑시'돌담에속삭이는햇발같이'중에서.
"오늘 하루 하늘을" - 김영랑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중에서.

 

 

 

3. '나'와 '하늘'을 페어링 하고 싶어지는 시

 
이런 시를 만나면 산만하기만 하던 정신의 초점이 한 곳으로 모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사느라고 얼루룩들루룩 해진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게 씻겨지는 느낌이 듭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 오늘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 김영랑 시 '2' 중에서

 
'고흔봄 길우에'. 이 구절로 보아 계절은 봄입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햇발이 속삭인다고 합니다. 봄이 왔다고요. 겨우내 움츠렸던 천지만물이 약동하는 봄이 왔다고요. 돌담에 대고요.

이런 구절은 순식간에 우리를 천진난만한 동화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돌담에 햇발이 비치는 것일 텐데, 시인님은 속삭인다고 했네요. 이런 세계에 들어있는 시인님은 얼마나 순진무구한지요.  
 
'햇발'은 사방으로 뻗친 햇살을 말합니다. 햇발에는 힘이 들어있는 햇살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봄이라서 햇살도 원기를 회복하나 봅니다. 그 봄의 팔팔한 햇발이 돌담에 속삭인다는데요, '얘들아,이제 봄이야! 봄이 왔다고. 이제 그만 깨어나!' 이렇게 돌담에게 속삭였을 것만 같네요. 그런 햇발의 온도에 그만 따스해진 돌담이네요. 거기에 몸을 기대어 고구마를 먹는 봄의 아이들은 또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아하, 봄을 맞은 샘물도 웃음을 짓는다네요. 얼음이 녹아 졸졸 넘쳐흐르는 샘물이겠지요? 샘물이 웃을 리가요. 그것은 시인님의 마음일 텐데, 그 샘물 흐르는 소리가 웃음 짓는 소리로 들린 시인님은 또 얼마나 아이 같은 마음인지요. 돌담의 햇발이나 풀 아래 샘물처럼 낮고 낮아서 잘 안 보이는 것들까지 살뜰히 챙겨보는 이 다정한 마음!
 
시인님의 티 없이 맑고 고운 마음, 순수하고 천진한 마음이 시를 타고 천천히 우리에게로 건너오네요. 이런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네요. '나'의 마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과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이 '하늘' 마음으로 보이게 되었네요. 
 
이처럼 낮고 낮은 사물에도 다정하고 살가운 마음이 되면 우리도 저절로 하늘을 우러르고 싶어질까요? '오늘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하늘을 잊고 살았는지요.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나'와 '하늘'을 따로 생각하며 살았는지요. '나'는 깊고 푸르고 아득히 높은 '하늘'과 연결된 속성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요. 
 
봄이 옵니다.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봄길로 나가 보렵니다. 그 고운 봄이 오는 길 위에서 고요히, 오늘 하루만이라도 고요히 하늘을 우러르고 싶어지네요. '나'와 '하늘'을 페어링하고 싶어지네요. 그러면 정말 좋겠지요?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 詩의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 김영랑 시 '2' 중에서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티 없이 맑고 고운 새악시입니다. 곧 새신랑과 손을 맞잡게 될 새악시입니다. 그 순수한 마음에 부끄러움의 파동이 일고 있네요. 얼마나 부끄럽고 또 좋을까요. 시인님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고 합니다.  
 
'詩의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새악시'에서 '詩의가슴'으로 건너오면서 우리는 새악시라도 된 듯 부끄러워지네요. '새악시'와 '시(시詩)'는 둘 다 순수함의 상징입니다.

새신랑을 만날 새악시의 순결한 가슴에 파동이 일듯, 새봄을 맞이한 시인님의 순결한 시심에 파동이 일고 있네요. 그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젓는 물결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고 합니다. 아, 이런 맑고 맑은 마음이라면 하늘은 정답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요. 그 마음에 하늘을 가득 담아주지 않을까요?
 
그렇게 바라보고 싶은 하늘은 어떤 하늘일까요?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 '보드레하다'는 꽤 보드라운 느낌이 있다는 뜻입니다. 에메랄드는 밝은 녹색을 띠는 보석이고요. 그러니 시인님이 본 하늘은 아주 보드랍고 밝은 녹색이 실비단처럼 얇게 흐르는 하늘이네요. 천지만물이 초록초록 소생하는 그 신비로운 봄의 하늘요.
 
봄입니다. 시인님의 맑고 깨끗한 시를 품고, 우리 순진무구한 시인님 뒤를 졸졸 따라 봄 하늘 우러르러 가십시다. '하늘'과 '나'를 페어링 해서 마음 가득 봄 하늘 채우러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영랑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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