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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노천명 시 이름 없는 여인 되어

by 빗방울이네 202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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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인님의 시 '이름 없는 여인 되어'를 만납니다. 우리도 속절없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노천명 시 '이름 없는 여인 되어' 읽기

 
이름 없는 여인 되어
 
노천명(1911~1957, 황해도 장연)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노천명 시집 「사슴」(창작시대, 2012년) 중에서
 

2.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라는 착한 욕심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이 1연에서 빗방울이네는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라는 구절이 너무 좋습니다.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라는 말은 얼마나 착한 욕심인지요.
 
누구라도 하늘을 욕심낸다고 그 하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런 욕심은 얼마나 '욕심껏' 부릴만한 욕심인지요. 
 
누구나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는 하늘이지만, 우리는 하늘을 얼마나 모르고 살고 있는지요.
 
시인님처럼 들장미 울타리를 만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는 하늘을 들여놓을 자리가 한 뼘도 없고요.
 
그래서 우리는 시인님처럼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름이 없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한 삶이네요. 그런 자족의 삶은 얼마나 부유한 삶인지요.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이 구절도 정말 멋지지요?
 
들장미 울타리의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요, 그 마당의 밤하늘에 뜨는 별을 '실컷' 안는다고 하네요.
 
시인님은 '욕심껏' '실컷'이라는 부사를 잇달아 사용해 '하늘'과 '별'을 품에 가득 안았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별'을 가득 안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지요. 
 
그런 시인님의 시간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편안한 시간이겠습니다.
 
문득 소로의 문장 하나가 떠오르네요.
 
우리는 사치품에 둘러싸여 있지만,
수많은 원시적 안락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다.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림원, 2021년 9쇄) 중에서
 
'원시적 안락함'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동안 세속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에 너무 몰두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네요.
 
나의 만족보다 남들이 만족하는 것에 말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니겠지요?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 노천명 시 '이름 없는 여인 되어' 중에서.

 

 

3. 산골의 밤을 오감으로 전해주는 '삽살개는 달을 짖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 삽살개는 달을 짖고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 2연에서는 '삽살개는 달을 짖고'라는 구절이 참 좋네요.
 
눈을 가릴 정도로 온몸에 복슬복슬한 털을 입고 있는 삽살개입니다.
 
그 삽살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고 하네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라고 되어 있네요.
 
삽살개가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들었을까요?
 
시인님이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는 얼마나 소곤소곤했겠는지요. 
 
그런 밤은 사방이 고요한 밤이네요. 산골의 밤은 또 얼마나 까만 밤인지요.
 
그런 까만 밤하늘에 뜨는 달은 또 얼마나 휘황찬란한 달이겠는지요?
 
마당의 삽살개는 이 깜깜한 고요 속으로 불쑥 등장한 환한 달에 놀랐다는 이야기이네요.
 
그 고요한 산골의 밤 풍경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이 구절도 참 부러운 구절이네요.
 
'어느 조그만 산골'입니다.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외진 마을요.
 
부엉이가 우는 밤이라도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다고 합니다.
 
내 옆에는 '내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요.
 
그런 사람만 있으면 뭐가 부럽겠는지요. 
 
혹시 세상에 이처럼 뜨거운 노랫말을 아시나요?
 
녹지 않는 얼음이 당신이라면 / 당신이라면 녹여주고파
살이 타는 불꽃 속이라도 / 둘이라면 난 따라가리
▷심수봉 노래 '이방인' 중에서
 
'살이 타는 불꽃 속이라도 둘이라면 난 따라가리'라는 구절에 혹시 눈이 휘둥그레지셨나요?
 
이런 뜨거운 사랑으로 나를 설레게 하는 '내 좋은 사람'만 곁에 있으면 정말 뭐가 더 필요하겠는지요. 거참.

시 ‘이름 없는 여인 되어’는 현재의 삶과 사랑, 행복을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시네요.
 
PS.
 
노천명 시인님의 '이름 없는 여인 되어'는 노래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빗방울이네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듣곤 한답니다.
 
노명희 가수님이 만든 노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입니다.
 
노천명 시인님의 시에 가락을 얹은 좋은 노래입니다.
 
노명희 가수님 특유의 처연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요, 모든 걸 훌훌 털고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온 느낌이 든답니다.
 
'내 좋은 사람'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 기분으로 이 노래에 젖어 있으면 진짜 얼마나 편하다고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노천명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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