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 서시'를 만납니다. 시인님이 제자의 동시집에 싣는 서문으로 써준 시입니다. 제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시입니다. 마음의 옷을 벗고 시인님의 정다운 시어로 저마다 외로운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읽기
「호박꽃 초롱」 서시(序詩)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도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공중에 떠도는 흰구름을 사랑한다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
이러한 시인(詩人)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러한 시인(詩人)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시를 만나기 전에 만나보는 특별한 이야기들
이 시를 읽고 나니 머릿속이 따뜻해집니다. 아주 추운 날 머리 위로 누군가가 예상치 않았던 훈기를 훅 하고 불어주는 느낌요. 겨울날 어떤 특별한 버스정류장 삿갓지붕 아래로 쓱 들어섰을 때처럼요. 위를 쳐다보면 그 처마에 바알간 전기난로가 달려있네요.
지금은 위를 올려다보니 거기에 따뜻한 난로같은 백석 시인님이 계시네요. 이 얼마나 좋은지요.
오늘 만나는 백석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 서시'는 「호박꽃 초롱」이라는 동시집 맨 앞에 실린 서시입니다. 이 동시집은 아동문학가 강소천 시인님 동시집이고요. 백석 시인님이 강소천 시인님의 동시집 발간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기 위해 서문을 겸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써주셨네요.
1941년 발간된 「호박꽃 초롱」은 우리가 좋아하는 강소천 님의 동시 '닭'이 맨 첫 시로 실린 동시집입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 강소천 동시 '닭' 중에서
어떤 인연으로 백석 시인님이 이렇게 멋진 '호박꽃 초롱 서시'를 선물했을까요?
백석 시인님(1912~1995)은 1936년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해 늦깎이 학생이던 강소천 님(1915~1963)을 제자로 만났습니다. 나이는 백석 님이 세 살 연상이지만, 백석 님은 이 해 초 발간한 첫 시집 「사슴」으로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던 때입니다. 그런 백석 님이 제자였던 강소천 님에게 시를 가르쳤네요.
강소천 님의 동시집 「호박꽃 초롱」의 장정도 참 아름답습니다.
백석 시인님의 친구였던 당대 최고의 출판디자이너 정현웅 님이 맡았습니다. 표지화를 보니 커다랗고 노란 호박꽃 한 송이가 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떴고요, 그 위에 아이 둘이서 호박꽃을 붙잡고 앉아 있어요.
그 호박꽃 주위로 '童謠詩集 호박꽃초롱 姜小泉著'라는 삐뚤삐뚤한 손글씨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요.
集詩謠童
롱초꽃박호
著泉小姜
이 표지를 열면 백석 시인님의 시 '호박꽃 초롱 서시'가 있다니요! 우리도 행복하지만 이 멋진 시를 받은 강소천 시인님은 얼마나 더요.
강소천 시인님이 얼마나 행복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피란지 부산에서 강소천 님과 교류하며 문학을 배운 동화작가 정원석 님(필명 박정주)의 회고를 잠깐 볼까요?
소천께서 적지 않은 동화집을 빌려 주셨다.
그중에 지금은 전설적인 존재가 돼 버린 동요시집 「호박꽃 초롱」이 있었다.
신기해하며 넘겨 보니 백석의 서시가 나왔다.
나는 속으로 소천이 부러웠다.
"어때요, 그 서시, 좋지요?"
그러더니 소천은 고개를 뒤로 제끼듯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그 시를 거침없이 내리 외는 것이었다.
그 득의만면한 모습, 그것은 그 서시와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 「강소천 평전」 (박덕규 지음, 교학사, 2015년)중에서
3.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선생님, 이번에 저 동요시집 내려는데요, 서문을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강소천 님은 이렇게 부탁했을까요? 이런 부탁을 받은 이라면 보통 이렇게 쓰겠지요?
'이번에 동요시집을 내는 강소천 시인은 심성이 아이같이 천진하며 ···'
그러나 역시 백석 시인님은 다릅니다. '스리 쿠션'으로 이 동시집의 지은이(강소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들려줍니다. 이렇게요.
한울은 /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하늘(한울)은 울타리(울파주) 옆에 우는 병아리, 우물돌 아래 우는 땅강아지 벌레(돌우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이런 낮고 낮은 당신의 시선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백석 시인님!)
울타리 옆에서 우는 병아리! 아, 강소천 님의 동시 '닭'이 떠오르네요. '물 한 모금 먹고 ~'. 이 동시집의 저자인 강소천 님을 이렇게 숨겨두었네요.
그러면서 백석 시인님은 슬쩍, 하늘은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흉내(임내) 내는 '시인'을 사랑한다고 하네요. 물론 이 '시인'이 강소천 시인님이겠네요.
버드나무에 매어져 있는 당나귀가 메에에~ 하고 소리를 냈는데, 그것을 듣고 '시인'이 메에에~ 흉내 냈다는 거네요. 여러 번 주거니 받거니요. 이런 강소천 시인님은 얼마나 개구쟁이 같은지요. 병아리 땅강아지 당나귀와 더불어 하늘의 품, 자연의 품 속에서 사랑하며 아껴주며 살고 있는 시인님입니다. 얼마나 정다운지요.
한울은 /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 /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 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삿갓 쓰고 사는' 버섯(버슷), '문 잠그고 사는 조개'라는 표현은 참말로 우리를 ‘자물시게’ 하네요. 버섯이나 조개가 친구처럼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고요. 시인님은 '호박꽃 초롱'불을 켜고(혀고) 산다고 하고요. 샛노란 호박꽃이 가득 피어있는 초가지붕 아래가 눈앞에 환하네요.
한울은 / 공중에 떠도는 흰구름을 사랑한다 /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시인(詩人)을 사랑한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이 바로 강소천(姜小泉) 시인님이네요. 소천(小泉), 작은 개울물은 골짜구니로 숨어 흐른다고 합니다. 자신을 내놓고 자랑하지 않고 골짜기로 숨어서 흐르네요. 이런 강소천 시인님은 ‘쟁글쟁글 햇볕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욕심 없는 시인님이네요.
한울은 / 이러한 시인(詩人)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러한 시인(詩人)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이 마지막 연이 압권이네요. 이렇게 소박하고 욕심 없는 시인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늘이요. 이런 시인님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요?
자, 우리 다음 시행을 ‘마음 무릎’을 꿇어 받읍시다.
이러한 시인(詩人)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 그러나 /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 백석 시 '호박꽃 초롱 서시' 중에서
이렇게 멋진 구절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석 시인님! 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겠는지요?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바라는 장삼이사는 이 구절에서 그만 목이 턱 막히네요. 출세와 명예의 길이라고 알려진 넓은 길을, 출세했다고 명예를 얻었다고 알려진 누구를 따라 졸졸 개미처럼 행렬을 지어 따라가고 있던 갑남을녀는요.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이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몰라주어도 송아지와 꿀벌이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좋겠습니다. 직박구리와 달개비꽃, 공벌레가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좋겠습니다. 목련꽃과 제비꽃, 미나리아제비꽃이 알아준다면요. 세상이 알아주는 것보다 이들이 알아봐 주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더 좋겠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칠월 백중'을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읽기 (117) | 2023.09.15 |
---|---|
문태준 시 아버지의 잠 읽기 (102) | 2023.09.14 |
김광섭 시 시인 읽기 (110) | 2023.09.12 |
유치환 시 그리움 읽기 (119) | 2023.09.11 |
마츠자키 이사오의 2주 시력 혁명 읽기 (108) | 2023.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