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님의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만납니다. '홀로움'이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시인님이 '발명'해 우리에게 건네주신 '홀로움'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읽기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 황동규(1938~ , 서울)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cc 1병,
짐빔(Ji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도 별 볼 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畫)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3년) 중에서
2. '소나기' 작가 황순원 님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오늘 만나는 황동규 시인님의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는 시인님의 12번째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에 실려 있습니다. 바로 만나봅니다.
부동산은 없고 /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부친은 우리 모두 좋아하는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님(1915~2000)입니다. 2000년 9월 14일 작고하셨고, 이 시에서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았다고 했으니 이 시는 2000년 10월에 쓰인 시네요. 황동규 시인님 63세 때입니다.
부동산은 없고
이 시의 첫 행입니다. 대학(경희대학교) 교수로 평생 교단에서 제자들 가르치고 소설작품 쓰며 살아온 아버지 황순원 님의 삶이 이 한 줄에 요약되어 있네요. 이 대목의 한 구석에서 아들 황동규 시인님의 옅은 한숨(?)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마주앙 백포도주 5병 / 호주산 적포도주 1병 / 안동소주 400cc 1병 / 짐빔(Ji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무늬 셔츠 하나 / 잿빛 양말 4켤레 /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참말로요, 이 대목은 황동규 시인님의 캐릭터를 여실히 보여주는 진술이네요. 어떤 상표(마주앙)인지, 그것이 백포도주인지 적포도주인지, 호주산인지 안동산인지, 1병인지 5병인지, 그것이 몇 cc짜리 병에 담겨있는지, 위스키는 어떤 브랜드(짐빔)인지, 그것은 얼마나 남았는지 속속들이 알려줍니다.
이는 시인님의 전략입니다. 우리를 자신의 품 가까이 당기려는 전략요. 우리는 너무 낯설고 신기해 목록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그 사연마저 상상하게 되네요.
'웃으시는 사진 한 장'이란 구절은 유산의 목록을 환하게 밝혀주네요. 이 '사진 한 장'이 아니었으면 그 유산의 '가벼움' 어쩔 뻔했겠는지요? 이 '사진 한 장'으로 인하여 아들은 더 짙은 그리움에 빠졌겠지만요.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 꼭 끼는 가을꽃무늬 셔츠 입고 /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서 전축마저 잠재우고 /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꼭 끼는 가을꽃무늬 셔츠'를 입고(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는 왜 자꾸 작아지시던지!)'잿빛 양말 신고'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아버지의 옷과 양말을 입고 신고 아버지의 몸이 되어 보네요. 적막한 가을날 오후, 시인님의 동그랗게 웅크린 작은 몸이 보입니다. 얼마나 그립고 또 외로운지요?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이런 섬세한 묘사를 만나는 순간, 참으로 고요해집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이네요. 우리는 시인님이 되어 난초 줄기를 오르는 '투명한 개미 한 마리'를 봅니다. 마침내 우리는 거의 개미가 되었네요. 그리고 개미는 거의 우리가 되었네요. 흔들림→ 멈춤 → 또 흔들림 → 멈춤의 길은 우리네 길이네요. 그리하여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라고 합니다. 끄응!
3.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 - 홀로움
올라봐야 별 볼 일 있겠는가 /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 베란다가 성화(聖畫)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올라봐야 별 볼 일 있겠는가'. 극도의 외로움이 느껴지는 시간이네요. 올라봐야 아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외로움, 그로 인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꼼짝할 수 없는 '꼿꼿한' 적막의 시간요.
그런데요, 이런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어둡고 나쁘기만 한 걸까요? 여기서 문득 이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우리 함께 읽은 김현승 시인님의 시 '슬픔'이 떠오르네요.
슬픔은 내가 / 나를 안는다 /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 김현승 시 '슬픔' 중에서
우리는 이 구절에 황동규 시인님의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을 접목해 이렇게 변주할 수 있겠습니다.
'외로움은 내가 / 나를 안는다 /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이렇게 슬픔이나 외로움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순수한 자아, 오롯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질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슬픔이나 외로움의 시간이야말로 사물의 본질, 세계의 본질에 바짝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겠네요.
그리하여 시의 화자는 추억이란 지난 시간에 대한 생각(애착)이 정지한 상태라는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화자의 의식이 온통 개미에게로 쏟아져 들어가네요. 외로움으로 씻겨진, 깊은 곳의 자신을 만났던 순간일까요?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시의 화자는 거기서 그만 일어서지 않고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쪼그려 앉아있네요. 환한 외로움, '홀로움'을 길게 음미하고 있는 걸까요?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이 시의 제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홀로움'은 황동규 시인님이 처음으로 만든 말입니다. 시인님은 2000년 펴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에서 '1997년 12월 24일 홀로움'이라는 시를 실었는데 이때 자신의 조어 '홀로움'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홀로움은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라는 뜻입니다. 아래 시인님의 문장으로 이 뜻을 곱씹어봅니다.
가을날 해거름 때 천수만에서 만난 헤어진 기러기 떼를
겨울 저녁 해남군 산이면 영암호에서 만난다.
천수만의 하늘, 그때 대오에서 떨어져 날던 기러기들도 거기 끼어 있을까?
힘겨워 뒤진 자도 있었겠지만
새파란 하늘을 혼자 날고 싶은 자도 있었을 것이다.
- 황동규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 지성사, 2003년)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글 중에서
홀로움. 시인님이 '발명'한 '홀로움'이라는 단어를 따라 여기까지 와 보니, 우리네 삶은 저마다의 외로움을 어떻게 홀로움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는 것만 같네요. 그대도 가끔 '홀로움'의 시간 보내시길!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 ‘즐거운 편지’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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