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님의 시 '길'을 만납니다.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길' 읽기
길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명동촌)
잃어버렸읍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읍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2022년) 중에서
2. 첫 시집에 넣으려 했던 19편은 어떤 시?
윤동주 시인님의 시 '길'은 시인님이 소중히 아끼던 19편의 시 가운데 한 편입니다.
1941년 11월 말, 시인님은 첫 시집 출간을 준비했습니다.
그 첫 시집에 넣으려고 했던 시는 어떤 시였을까요?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서정시학, 2018년)에 그 시 목록이 나옵니다.
1. 자화상
2. 소년
3. 눈 오는 지도
4. 돌아와 보는 밤
5. 병원
6. 새로운 길
7. 간판 없는 거리
8. 태초의 아침
9. 또 태초의 아침
10. 새벽이 올 때까지
11. 무서운 시간
12. 십자가
13. 바람이 불어
14. 슬픈 족속
15. 눈 감고 간다
16. 또 다른 고향
17. 길
18. 별 헤는 밤
시인님은 그동안 써둔 시 가운데 이렇게 18편을 고르고 난 뒤 시집 맨 앞에 넣기 위해 그 유명한 '서시'를 썼습니다.
이 '서시'를 쓴 날이 1941년 11월 20일입니다.
그렇게 모두 19편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 17번째 시로 '길'이 있네요.
그만큼 '길'은 시인님이 독자들에게 먼저 선보이고 싶은 시였네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에 시 '길' 맨 끝에 시가 쓰인 연월일이 적혀 있습니다.
'一九四一·九· 三一'.
이 한자가 세로로 인쇄되어 있는데, 1941년 9월 31일입니다. 9월의 끝날은 30일이므로 아마 '三一'은 활판을 앉히면서 생긴 '二二'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길'이 9월에 쓰인 시라는 점은 확실하겠네요. 우리가 잘 아는 시 가운데 이해 9월에 쓰인 시로는 '또 다른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중략)
가자 가자 /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 시 '또 다른 고향'에서 시인님은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현실적 자아인 '백골'을 벗어나, 이상을 추구하며 본질적 자아의 삶을 사는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또 다른 고향'과 같은 9월에 쓰인 시 '길'에서도 시인님은 본질적 자아를 지향하고 또 찾으려 부단하게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잃어버렸읍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갑니다'
첫 행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네요.
첫 행은,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걸까, 궁금해하는 우리의 시선을 '주머니' 속으로 이끌었다가 다시 '길'로 이끕니다.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아 '길'을 나선 화자를 따라 우리도 '길'을 나서게 됩니다.
화자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 바로 '길'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네요.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길'은 험난한 길이네요.
우리는 이즈음에서 '길'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삶의 길은 화자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도정(道程)입니다.
삶의 길이 어디 호락호락하던가요. 무시로 우리를 넘어뜨리는 돌부리도 있고 캄캄하게 앞을 가로막는 넓은 강과 높은 산도 있습니다.
그런 삶의 길이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있다고 하네요.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들어갈 통로도 없다고 하고요.
참으로 절망적인 삶의 길이네요.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읍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화자는 쉬지 않고 길을 걸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네 삶의 길은 중단할 수 없습니다. 중단되어서도 안 되는 삶의 길입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 처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돌담) 앞에서 낙담할 때도 있었습니다.
'처다보면(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이 구절에서 화자의 심정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고 있는 자신이 푸른 하늘에 투영되었네요.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꼈네요.
이 시 '길'이 9월에 쓰이고 두 달 후 쓰인 '서시'(1941. 11. 20)의 한 구절을 잠시 만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시인님은 부끄러움 없는 삶을 지향했습니다.
이즈음 우리는 '길'에서 찾는 것, 화자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점 부끄러움 없는 자아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끄러이 굴하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며 꿋꿋이 나아가는 참된 자아 말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이 구절의 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네요.
시 '길'이 쓰인 두 달 후 쓰인 시인님의 다른 시 '별 헤는 밤'(1941. 11. 5)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읽어봅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진 별을 /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두 시의 맥락이 매우 비슷하게 다가오네요. 이렇게 화자는 미래를, 미래의 나를 생각합니다.
지금은 어려운 현실이지만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를 위해 이 어려움을 견뎌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나를 넘어서야 '담 저쪽에' 있을 참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네요.
지금 여기에서 고통과 외로움으로 절망한 채 주저앉아 부끄러이 울기만 한다면 '담 저쪽에' 있을 참된 나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휩쓸리며 지조 없이 살아가는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고 쉼표 하나, 그리고 '다만' 하고 또 쉼표 하나가 찍혔습니다.
이렇게 쉼표를 두 개씩이나 찍으며 시를 끝낸 이 마지막 연에서 시인님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네요.
잃어버린 것을, 본질적인 자아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고 하는 시인님이네요.
그렇게 참된 자아 찾기는 바로 삶 전체의 목적, 존재의 이유라고 합니다.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요?
시 '길'은 저마다의 삶의 길에서 이렇게 본질적인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현실에 안주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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