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님의 시 '봄'을 맞이합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화사하고 힘찬 기운이 몸과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봄' 읽기
봄
▷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명동촌)
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22년) 중에서
2. 시를 만나기 전에 만나 보는 이야기
윤동주 시인님의 시 '봄'은 1942년 시인님이 일본 동경 릿교대학 유학 중 서울의 친구 강처중 님(연희전문 동기생)에게 보낸 다섯 편 중 하나입니다. 시인님이 생전에 쓴 마지막 다섯 편의 시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자기 성찰의 분위기가 강한 윤동주 시인님의 다른 시와는 달리 매우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서정시학, 2018년)에 이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취재 내용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맑고 밝은 시 '봄'을 썼던 시기에 윤동주 시인님 가까이 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윤동주 시인님의 누이동생 윤혜원 님의 증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서 이 시 '봄'을 포함해 5편을 동경에서 서울의 친구 강처중 님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윤동주 시인님은 그해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합니다. 그때 시인님이 누이동생 윤혜원 님에게 동경에서 만난 한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여성은 자신의 오빠와 함께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함북 온성 출신의 박춘혜 님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님의 친구이기도 한 이 오빠라는 분이 자기 여동생 사진을 윤동주 시인님에게 건네주었다고 하네요. 이 오빠라는 분이 윤동주 시인님을 자기 여동생(박춘혜) 남편감으로 단단히 점찍은 것 같았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김치를 먹고 싶으면 그 오누이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이 싹트고 있었던 걸까요?
3. '즐거운 종달새야 ··· 즐거웁게 솟쳐라'
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이 시의 첫 행은 참으로 보석 같습니다. 봄이 오는 기척을 이처럼 온몸으로 느끼는 시인님이네요. 그래서 우리도 이 구절로 인해 봄이 우리의 혈관 속에 시냇물처럼 흐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요. 겨우내 얼어붙었던 시냇물이 봄기운에 풀려 돌돌돌 흐르듯이요.
자연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니까요. 생명의 하나인 인간도 자연이니까요. 이렇게 자연과 우리는 하나이니까요. 자연의 변화와 리듬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입니다. 시인님의 몸도 우리의 몸도 생동하는 기운으로 '돌돌돌' 넘쳐나네요.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삼동(三冬)'. 여기서는 '겨울의 석 달'이라는 의미로 새겨봅니다. 춥고 긴 겨울을 참아왔다고 합니다.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이 구절도 참으로 살가운 표현이네요. 풀포기도 나도 삼동을 참아왔습니다. 이제 봄이어서 풀포기가 피어나고 나도 피어난다고 하네요.
나는 다른 무엇도 아닌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라고 하네요. 높고 크고 드문 어떤 것이 아니라 낮고 작고 흔한 풀포기에 가 있는 시인님의 다정한 시선도 가만히 느껴봅니다. 그동안 땅 위에 보이지 않던 풀포기가 뽀록뽀록 새잎을 밀어내듯이 피어난다고 말하는 시인님에게 어쩐지 좋은 일이 있는 것만 같네요. 누구라도 봄이라면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지 않던가요?
즐거운 종달새야 /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즐거운', '즐거웁게'. 이 3연에서 즐겁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오네요. 봄을 맞은 시인님에게 분명 좋은 일이 있었을 것만 같네요. 동경에서 만난 그 여성이 마음에 온통 가득 차 있었을까요?
'종달새'. 노고지리, 종다리라고도 합니다. 참새보다 조금 큰 새입니다. 그런데요, 이 새는 매우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솟쳐라'. 이 구절처럼 종달새는 땅에서 수직으로 하늘로 솟구쳐 박각시나방처럼 날개를 퍼덕여 공중에 정지비행을 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 새입니다.
보리밭이나 풀밭 같은 땅 위에 둥지를 트는데 그 둥지에서 그렇게 하늘로 수직 상승하는 종달새는 얼마나 신묘한 능력의 소유자인지요. 이 구절을 읽으니 아무 걸림 없는 푸르고 깊은 하늘을 온 힘을 다해 마음껏 솟구치고 싶네요. 생명이 충만한 봄에 시인님도 새로운 희망을 분출하고 싶었을까요?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끝이 나지 않았네요. 종달새에게 즐겁게 솟구쳐보라고 해놓고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로 시를 맺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푸르른 하늘'은 아득히 높아서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미지(未知)의 세계입니다. 시인님이 솟구치고 싶은 곳, 걸어가야 할 곳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입니다.
이 시 '봄'과 함께 서울의 친구 강처중 님에게 부친 다섯 편 중 하나인 '쉽게 씌어진 시'의 마지막 행을 잠깐 만나봅니다.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 구절은 일제 강점기의 억압받는 나약한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읽힙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각오가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그 이후 시인님은 독립운동을 펼쳤고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다시 시 '봄'의 마지막 구절을 읽습니다.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저 말줄임표 속에 들어갈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봄을 맞아 몸속 혈관 속에 봄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풀포기처럼 피어나고, 종달새처럼 즐겁게 솟구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렇게 푸르르고 높은 미지의 세계로 마냥 솟구칠 수 없는 식민지 시간의 억눌린 처지를 돌아보게 되었던 걸까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서서, 이상과 현실의 접점에 서서 미지의 세계로 힘껏 솟구치고 싶은 노고지리 같은 마음이 저 말줄임표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글의 모두에서 소개된 시인님의 사랑, 그 사랑은 끝내 꽃피지 못했습니다. 앞에 소개된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이 시가 쓰여진 후인 그해 여름방학 때 시인님이 일본에서 귀향했듯이 그 여성도 귀향해서 다른 사람과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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