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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서정주 시 동천

by 빗방울이네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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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님의 시 '동천(冬天)'을 만납니다. 서정주 시인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입니다. 시인님이 겨울하늘에서 쏟아부어주는 천상수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정주 시 '동천' 읽기

 
동천(冬天)
 
-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시집 「질마재로 돌아가다」(서정주 지음, 미래문화사, 2001년 1쇄, 2002년 3쇄) 중에서.

 

2. 시 속의 '눈썹'이 상징하는 것은?

 
서정주 시인님의 시 '동천(冬天)'은 1968년에 출간된 시집 「동천」의 표제시입니다. 그만큼 시인님에게 중요한 시라는 의미겠지요.

이 시는 시집에 실리기에 앞서 1966년 「현대문학」에 발표됐는데, 이 때는 시인님 52세, 지천명(知天命)이 지난 나이네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서정주 시인님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시', '우리말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상징' 등의 찬사를 받는 작품입니다.
 
시에 들어가기 전에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려 봅니다.
 
시리도록 푸르고 깊은 겨울하늘('冬天')이 그림의 배경입니다. 그 배경에 새하얀 초승달이 떠 있고요, 새가 날고 있습니다. 
 
시인님이 본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도 이런 구도는 가끔 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간결한 한 폭의 동양화를 가지고 시인님은 어떤 세계를 지어놓았을까요?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겨울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면서 시인님은 눈썹을 떠올렸네요. '초승달 같은 눈썹'이라는 말도 있듯 초승달에서 눈썹을 떠올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다음 2행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초승달을 보고 눈썹을 떠올렸던 시인님이 그것을 꿈으로 맑게 씻었다고 합니다. 
 
'즈믄'은 '천(千)'의 옛말입니다. '즈문 밤'은 시인님 고향(전북) 방언으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네요. 그러니까 1,000일의 밤, 아주 오랜 날들의 밤이라는 의미인데, 이 예스러운 단어가 주는 그윽한 울림이 우리를 공중으로 높이 올려주네요.
 
'즈문 밤'이 이끄는 2행을 읽고 나서, '무얼 이리 씻어야했을까?' 하고 어리둥절해진 우리는 다시 1행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네요.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고운 눈썹'을 '즈문 밤의 꿈'으로 씻는다고 하네요. 눈썹을 왜 그리 오랫동안 씻어야했을까요.

시인님은 겨울하늘의 초승달에서 눈썹을 떠올렸습니다. 초승달은 만월로 가는 중이겠지요? 점점 차올라 보름달이 되고 또 초승달이 되고 또 보름달이 되고 또 초승달이 되겠지요? '즈문 밤', 수많은 밤이 지나가는 동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초승달에서 떠올린 눈썹이 수많은 밤 동안 지극 정성으로 씻고 닦는 '어떤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씻고 닦으며 어떤 완성(보름달), 절대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하는 것임을요. 
 

"즈문밤의꿈으로"-서정주시'동천'중에서.
"즈문 밤의 꿈으로"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3. 눈썹 같은 초승달이 만월로 차오르도록 정진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눈썹'의 상징은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삶의 지향점, 구도(求道)를 향한 화두(話頭)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두라면, '고운 님'은 부처님이나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상징하겠네요. 어떤 경우라도 그것은 무수한 좌절과 고뇌, 끊임없는 인과(因果)의 시간을 거쳐 완성되는 것입니다.
 
시인님은 그러한 삶의 지향점, 또는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화두를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다고 합니다. 참으로 광대무변한 스케일이네요.

시인님이 하늘에 심었다고 하는 것은 물론 '초승달'입니다. 이로써 초승달은 하늘에 떠 있는 자연의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시인님의 삶의 지향점과 섬세하게 연결된 상관물이 되었습니다. 시인님과 자연/하늘이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1행부터 3행까지 이어진 서술, '눈썹을' '씻어서' '하늘에 옮기어 심어' 놨다는 말의 의미를 새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동천(冬天)'이라는 점을 떠올려봅니다.
 
겨울하늘(冬天)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차갑고 깊습니다. 뜨겁고 열렬한 감정이 아니라 얼음같이 차가운, 냉철하고 투명한 이성적인 자세가 느껴집니다. 시인님의 마음상태입니다.

화두를 저 아득한 공중에 걸어두고(온 천지가 시인님의 의지에 동참하는!) 겨울하늘 같은 마음 바탕으로 날마다 정진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네요. 눈썹 같은 초승달이 만월로 가득 차오르도록 구도의 길을 꿋꿋하게 걷겠다는 커다란 마음 말입니다.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매섭다는 것은 성질이나 기세가 매몰차고 날카로운 것을 말합니다. 동지섣달에는 새에게 물도 먹이도 찾기 어려운 인고(忍苦)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生)을 위해 혹독한 시련을 견디며 힘껏 비상하는 새의 기세는 봄날의 그것처럼 범상할 리 없을 것입니다.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시 '동천' 중에서

시인님은 그런 매서운 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까요? 구도의 길을 들어선 자신에게서 매서운 새의 모습을 본 것일까요? 아까 초승달을 자신과 연결시킨 시인님은 이제 새까지 자신의 상관물로 공유합니다.

보통 새는 초승달이 뜬 하늘을 날았겠지만 시인님과 일체가 된 새라면 초승달을 비껴날 것입니다. 그건 시인님의 마음일텐데요, 새와 하늘, 이 자연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구절에서 시인님이 하늘에 옮겨 심어둔 ‘눈썹’에 대한 외경심이 광대무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冬天)과 합치된 시인님은 겨울하늘에 고귀한 뜻을 초승달로 심어두고 동천처럼 깊고 푸르고 시린 마음으로 머리 위의 만월을 향하여 걸어갔겠네요.
 
시 '동천(冬天)'은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동천에 적셔 깊고 푸르고 시리게 일깨워주는 것만 같습니다. 서늘해지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서정주 시인님의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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