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님의 시 '눈'을 만납니다. '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snow'일까요? 'eye'일까요? 시인님이 퍼올려주시는 사유의 목욕물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수영 시 '눈' 읽기
눈
- 김수영(1921~1968, 서울)
눈을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김수영 시집 「사랑의 변주곡」(김수영 지음, 창비, 2017년 1쇄) 중에서
2. '눈'은 'snow'일까요? 'eye'일까요?
김수영 시인님의 시 '눈', 잘 읽어보셨나요? 그대는 '눈'을 무엇으로 읽었는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시의 묘미(妙味)는 시를 읽는 동안 '눈'이 'snow'와 'eye'를 우리 머릿속에 번갈아가며 떠올려준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같은 '눈'의 중의성(重意性)으로 인해, 시인님 36세 때인 1956년 쓰인 이 시는 70여 년이 흐른 오늘날(2023년)에도 명편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눈은 살아 있다 /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김수영 시 '눈' 중에서
이 시의 '눈'이 'snow'라면 우리가 흔히 'snow'를 묘사할 때 쓰는 '내린다', '쌓인다', '희다' 같은 표현이 등장할 법한데 그런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눈'이 'snow'와 'eye'를 오가는,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정치(情緻)한 장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눈'이 'eye'라면, '눈'은 세상의 눈(eye)들, 억압과 고통에 지쳐 꿈을 포기하고 체념한, '좌절의 시선들'이라는 느낌이 들게 되네요. '마당 위에 떨어진'. 좌절과 절망의 냄새가 납니다. 시인님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4·19 등 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헤쳐왔습니다. 그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사회구조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그 민초들의 눈(eye) 말입니다. 시인님은 그 눈(eye)은 떨어졌지만, 마당 위에 떨어졌지만 살아있다고 합니다. 이는 스스로의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억압에 본의 아니게 희망/눈을 접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의식은 깨어있다고, '살아있다'라고 하네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 전면의 배경으로 새하얗게 내려 쌓인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는 눈(snow)을 동시에 연상하게 됩니다. 'snow'와 'eye'가 서로 뒤섞이면서 시의 보폭이 더 높고 넓게 확장되네요.
기침을 하자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 기침을 하자
- 김수영 시 '눈' 중에서
'젊은 시인'은 깨어있어야 하는 자이겠지요? 시대의 어둠에 맞서 풍향계 역할을 해야 할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제대로 '마음 놓고' 기침조차 못하고 살았네요. 부조리와 억압에 항거하지 못하고 일상성에 매몰되어 비굴하게 움츠리고만 있었네요.
시인님도 35세의 '젊은 시인'입니다. 이제 깨어있다, 살아있다는 표시를 하자고 합니다. 시인님 스스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는 의지도 느껴지네요. '눈더러 보라고'. 민초들의 좌절의 눈(eye)을 향하여 '이렇게 깨어있다'라고 '기침을 하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눈(snow)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음속의 괴로움, 마음껏 토로할 수 없었던 울분을 기침으로 토해내자고 합니다. 그래서 기침을 하는 행위는 오염되고 나약한 자신을 새하얀 눈(snow)으로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켜 진정한 자아를 되찾는 의식을 연상하게 됩니다.
3.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 김수영 시 '눈' 중에서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 이는 '살아있는 눈(eye)'의 주체로 읽힙니다. 시대의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민초들의 의식(eye)은 죽음을 잊고 살아있습니다. 시대의 어둠을 초롱초롱 지켜보고 있네요.
이와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간밤에 세상을 새하얗게 덮은 눈(snow)을 생각합니다. 그 순수한 생명 같은 눈(snow)이 시대에 대한 절망과 고뇌로 잠 못 드는 영혼과 육체를 순수하게 씻어주고 지켜주기 위해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고 합니다.
기침을 하자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 마음껏 뱉자
- 김수영 시 '눈' 중에서
'눈을 바라보며'. 눈(eye), 즉 민초들의 깨어있는 눈/의식을 직시하며, 현실을 더욱 냉철히 인식하며,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고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요. 이제 더 이상 부조리와 억압에 굴복하지 말자고, 더 이상 숨어 움츠리지 말자고 하네요.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 그동안 얼마나 가슴에 쌓인 것이 많았을까요? 영혼을 잠식하던 비굴과 나약함을 시원하게 뱉어내고 일어서자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대는 '눈(snow)'을 떠올렸군요. 눈의 순백하고 명징한 차가움 속에 나약한 정신을 씻어보자는 생각을 했군요. 그 또한 잠자고 있던 정신을 번쩍 깨우는 멋진 생각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수영 시인님의 시 '풀'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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