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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적경

by 빗방울이네 202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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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적경(寂境)'을 만납니다. 이 시는 우리를 다른 세상, 다른 풍경 속으로 데려갑니다. 생활 속의 온갖 소음을 일순간 소거할 수 있는 고요 속으로요. 시인님이 만들어놓은 고요 속에 가만히 앉아 저마다의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적경(寂境)' 읽기

 
寂境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신살구를 잘도먹드니 눈오는아츰
나어린안해는 첫아들을낳었다
 
人家멀은山중에
까치는 베나무에서즞는다
 
컴컴한부엌에서는 늙은홀아버지의시아부지가 미억국을끄린다
그마음의 외딸은집에서도 산국을끄린다
 

- 1936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백석 시집 「사슴」(백석 지음, 소와다리 출판, 2016년 2판1쇄) 중에서

 

2. 고요 속으로 데려가 우리를 씻겨주는 시

 
외롭고 쓸쓸한, 애절한 고요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씻겨주는 시, 바로 백석 시인님의 시 '적경(寂境)'입니다.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사슴」(1936년 발행)에 실려있습니다.
 
'적경(寂境)'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국어사전에 안 나오네요. 시인님이 만든 단어인데 이 자체로 한 폭의 깊은 풍경이네요. '적(寂)'은 '고요하다' '쓸쓸하다'는 의미입니다. '寂'은 집 '면(宀)', 아재비 '숙(叔)'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재비 숙(叔)은 원래 콩 '숙(尗)'이었다고 합니다. 집이 너무 조용하여 콩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네요. '경(境)'은 '경계' '경우' '상태'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제목 '적경(寂境)'의 의미를 '고요하고 쓸쓸한 곳'으로 새겨봅니다.
 
위의 시에 적힌 띄어쓰기는 원문 그대로를 옮긴 것입니다. 이렇게 띄워 읽어달라는 시인님의 뜻이겠지요. 시인님 부탁대로 띄워 읽으면 시인님 호흡에 한결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요.
 
신살구를 잘도먹드니 눈오는아츰 / 나어린안해는 첫아들을낳었다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보통 사람은 잘 먹지 못할 정도로 맛이 신 신살구(풋살구)네요. 지난가을 만삭에 이르던 나이 어린 아내(안해)는 입덧을 하면서 그렇게 신맛을 찾았군요. 여보, 우리 아이가 저 풋살구 먹고 싶다 하네요. 그렇게 말하던 임신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불룩한 배를 쓰담쓰담하면서요.
 
눈 오는 아침(아츰)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축복처럼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아침에 첫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반갑고 행복하겠는지요? 세상천지 하얀 아침의 고요를 흔드는 갓난이의 첫 울음소리가 그 고요를 우리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 보여 주네요.
 
人家멀은山중에 / 까치는 베나무에서즞는다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이 눈 오는 아침에 아기를 낳은 집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산속에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곳이네요. 그런 곳에서 배나무(베나무)에서 까치가 짖네요. 까치는 둥지에 정착해서 살기 때문에 자기 집 주위를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의 모습은 어떤지, 그 사람의 음성을 어떤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낯선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동안 없던 아기 울음소리가 난 것입니다. 까치는 얼마나 놀랐겠는지요? 그래서 까치들은 이 낯선 사태를 둘러싸고 시끄럽게 지저귀며 향후 대책을 논의 중입니다. 그런 까치 소리도 인가 멀은 산속 외딴집, 눈 오는 아침의 고요를 증폭시켜 주네요.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처음 우는 고고성(呱呱聲), 그리고 까치의 지저귐, 지금 들리시지요? 
 

"신살구를잘도먹더니"-백석시'적경'중에서.
"신살구를 잘도 먹더니"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3. 서정적 자아의 정체성은 무얼까요?

 
컴컴한부엌에서는 늙은홀아버지의시아부지가 미억국을끄린다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요?

 

1연에서 만난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나어린안해는 첫아들을낳었다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이 구절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산모의 남편이 이 시의 서정적 자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늙은홀아버지의시아부지가 미억국을끄린다'는 구절이 나왔을까요? 남편은 어디 가고 시아버지(시아부지)가 미역국(미억국)을 끓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돌발적인 상황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서도 미역국을 끓일 수 없는 형편인 것이 분명합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늙은 홀아버지인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이진 않을 테니까요.
 
남편이 집에 있다는 사실은, 시의 내용에서 아내가 만삭일 때 풋살구를 잘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 아내가 첫아들을 낳은 날이 눈 오는 아침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네요. 서정적 자아의 정체성 말입니다. 그 정체성을 밝히러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정은, 산모의 남편이자 홀아버지의 아들이 병중(病中)이라는 것입니다.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 말입니다. 그런데 왜 '늙은 홀아버지의 시아버지'라고 지칭했을까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표현하기에는 서로 간에 너무 먼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이 구절은, 서정적 자아인 남편, 즉 아들의 발언으로는 어쩐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자신의 아버지를 객관화해 낯선 느낌을 줍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남편)이 출산일의 아침을 고요히 관찰하고 있는 듯한 으스스한 느낌 말입니다. 
 
저 세상 사람이 이승의 일을 보면서 진술하고 있는 상황은, 그 가정만으로도 우리의 모골(毛骨)을 송연(悚然)하게 합니다. 아파서 혹은 사고로 남편이 일찍 세상을 여의게 되었지만 배가 만삭이었던 아내를 두고 차마 저승길을 떠나지 못했네요. 그래서 이승의 아내가 첫아들을 낳고 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이고 있는 일을 고요히 보고 있다는 설정은 적경(寂境) 속 삶의 애환을 증폭시킵니다. 숨도 쉴 수 없는 적막이네요.
 
그마음의 외딸은집에서도 산국을끄린다

- 백석 시 '적경' 중에서

 
그러면 망자(亡者)의 눈에는 늙은 홀아버지의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이는 부엌이 컴컴한 부엌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 시아버지의 '마음'도요. 그 ‘마음’ 속 외딴집에서도 산국(미역국)을 끓인다도 사실도 알겠습니다. 
 
시아버지는 지금, 없는 아들을 대신해 며느리의 산국을 끓이면서 예전에 아들을 낳았을 때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아들의 출산날 산모인 아내를 위해 자신이 산국을 끓였네요. 아들을 낳았던 그때의 집도 지금처럼 외딴집이었다고 하고요.

 

짧은 시 한 편에 새 생명의 탄생, 그리고 견딜 수 없이 기구한 삶의 고통이 버무려져 있었네요. 애절초절한 '적경(寂境)'이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가즈랑집'을 만나 보세요.

 

백석 가즈랑집

백석 시인님의 시 '가즈랑집'을 만납니다. 백석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사슴」의 대표선수, 첫 시입니다. 시인님이 퍼올려주시는 따뜻한 시어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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