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님의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를 만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거리의 불빛을 보게 될 때마다 하모니카가 생각나고, 잊고 있던 그리운 이도 떠오르게 될 겁니다. 시인님이 펼쳐주신 몽환경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서정주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읽기
노처(老妻)의 병상 옆에서
-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병든 아내가 잠들어 있는
병원 5층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은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55년 전의 달밤 성북동에서
소년 시인 함형수가 불고 가던
하모니카의 도리고의 세레나데 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함형수가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꼭 그 하모니카 소리만 같다.
'쐬주는 제일 좋은 친구지만
이것만 가지구선 안심치가 않아
그 선생인 소금을 곁들여서 마시노라'고
지낸 낮에 짜장면집에서
그 두 가지만 서서 먹고 앉았던
늙은 사내가 생각이 난다.
그 사내도 지금 저 하모니카 같은 불들을
보고 있을까? 그리고 함형수는
이걸 또 하모니카로 불고 있는 것일까?
- 「질마재로 돌아가다」(서정주 지음, 미래문화사 출간, 2001년 1쇄, 2002년 3쇄) 중에서
2.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서정주 시인님의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맨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0. 3. 11. 오전 2시 반, 부산 동래의 '우리들 병원'에서.
시인님 75세 때였네요. 아픈 아내를 데리고 부산 동래의 '우리들 병원'에 오셨네요. 1982년 '이상호 신경외과'로 출발한 '우리들 병원'은 척추전문병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병든 아내가 잠들어 있는 / 병원 5층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은 /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 서정주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중에서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이 '하모니카 구멍(구먹)들 같다'는 생각은 얼마나 환상적인지요? 햐, 그 하모니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하모니카네요.
새벽 2시 반에 병원 5층 유리창 밖을 보고 있는 75세 시인님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잠들었고요. 거리에는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네요. 오가는 사람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입니다. 그 고요한 거리의 불빛 행렬에 도취해 시인님은 환상의 세계를 만나고 있습니다. 몽환경(夢幻境) 속으로 빠져들었네요.
이렇게 고독할 때 시인님은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55년 전의 달밤 성북동에서 / 소년 시인 함형수가 불고 가던
하모니카의 도리고의 세레나데 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함형수가 /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꼭 그 하모니카 소리만 같다
- 서정주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중에서
몽환적인 불빛 행렬은 시인님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 먼 시간 속에서 떠오른 사람, 시인님의 소중한 사람이 있었네요. 바로 시인님의 절친 함형수 시인님입니다.
시 '해바라기의 비명'으로 유명한 함형수 시인님(1914~1946)은 서정주 시인님과 1936년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분입니다. 서정주 시인님이 한 살 아래지만 서로 절친이셨네요.
서정주 함형수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님들은 일제 강점기, 서울 명동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함께 지냈던 문우들이었습니다. 함북 출신으로 '러시아 미남'이란 별명을 가졌던 함형수 시인님은 늘 하모니카와 낡은 시 노트를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받았던 비참한 서울 생활 속에서도 꿈과 낭만을 잃지 않았던 청춘이었네요.
함형수 시인님이 그 시절 하모니카로 즐겨 연주했던 노래가 '드리고의 세레나데'였네요. 이 가락은 서정주 시인님의 기억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던 걸까요? 55년 후 이렇게 부산의 한 병원에서 불현듯 환청처럼 들려왔네요. 거리의 전등불빛이 하모니카 구멍 같았다는 시인님은 이제 그 구멍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죽은 함형수가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풍경'에서 '하모니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3. '함형수는 이걸 또 하모니카로 불고 있는 것일까?'
'쐬주는 제일 좋은 친구지만 / 이것만 가지구선 안심치가 않아
그 선생인 소금을 곁들여서 마시노라'고 / 지낸 낮에 짜장면집에서
그 두 가지만 서서 먹고 앉았던 / 늙은 사내가 생각이 난다
- 서정주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중에서
시인님은 낮에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나 봅니다. 병든 아내를 잠시 병실에 혼자 두고요. 그때 그 중국음식점에는 소금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는 '늙은 사내'가 있었네요. 그 '늙은 사내'도 고독의 감방에 홀로 갇혀 있었나 봅니다.
그 사내도 지금 저 하모니카 같은 불들을 / 보고 있을까? 그리고 함형수는
이걸 또 하모니카로 불고 있는 것일까?
- 서정주 시 '노처의 병상 옆에서' 중에서
'그 사내도' 시인님처럼 병간호 중이었을까요? 이 새벽에 깨어 시인님처럼 병실 밖의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시인님의 절친 함형수 시인님은 딴 세상에서 하모니카로 '드리고의 세레나데'를 불고 있었을까요?
'드리고의 세레나데'를 찾아 플루트 연주로 들어보니 참 애절하네요. 하모니카로 불면 더 애절한 느낌일 것 같습니다. 가곡도 있습니다.
달 밝은 외로운 밤 물가에 홀로 서서
출렁이는 밤바다 잔물결 소리 들으면
한없이 그리운 친구 지나간 날 더욱 그리워
꽃 같은 너의 모습이 이내 가슴에
고요히 떠온다 떠온다
- 세계애창가곡 '드리고의 세레나데' 중에서
우리는 삶에서 혼자 헤쳐가기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렇게 추억 속의 그리운 이가 부표처럼 저절로 수면 위로 떠오르나 봅니다. 고된 시절 힘든 일을 함께 겪으며 서로를 다독여주며 고난을 헤쳐왔던 사람 말입니다. 서정주 시인님에게는 55년 전의 절친 함형수 시인님이 그런 사람이었네요. 지금 아내가 많이 아프다···. 그 절친에게 이렇게 말하며 기대고 싶었겠지요.
이 시에는 아내의 병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인님의 아내가 얼마나 아픈지, 그것 때문에 시인님의 걱정이 얼마나 깊은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거리의 전등불빛이 촉발한 하모니카, 하모니카가 촉발한 오랜 친구, 그 친구가 불던 환청 같은 하모니카 소리에 시인님의 고독이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서정주 시인님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