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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통영

by 빗방울이네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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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통영'을 만납니다. 문득 통영에 달려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통영' 읽기

 
통영(統營)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녯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백석시전집-附·散文」(백석 지음, 이동순 편, 창비, 1987년 1쇄, 2006년 20쇄) 중에서
 

2. 통영에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은 이유는?

 
경남 통영에 가면 백석 시인님의 시가 골목길의 벽에 붙어 있습니다. 거북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를 끼고 있는 강구안 골목길에 말입니다. 오늘 만나는 '통영'이라는 시도 시화로 제작되어 담벼락에 딱 붙어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사람이고 서울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백석 시인님의 시가 멀고 먼 남해 바닷가에 걸려 있네요. 백석 시인님은 '통영'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시인님이 사랑했던 연인 박경련 님의 고향이 통영이기 때문입니다.
 
백석 시인님은 1935년 서울에서 이화여고보를 다니던 박경련 님을 처음 만났고, 그해 여름 그녀의 고향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렇게 통영을 다녀오고 난 뒤 이 시 '통영'을 지어 그해 12월 「조광」에 발표했습니다. 
 
백석 시인님은 이때 24세, 박경련 님은 아리따운 18세였습니다. 그녀를 마음 깊이 품고 있었던 백석 시인님. 처음 가본 남도 땅 통영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녯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줄어서 된 말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정부는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이 지역에 두었습니다.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님이었고요.
 
누구라도 통영에 도착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어딘가 장군님의 정다운 흔적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1935년, 일제강점기)은 낡은 항구라고 하네요. 쓸쓸함이 항구를 휘도는 느낌입니다.
 
'녯날이 가지 않은'. '옛날 같은', '예스러운'의 뜻으로 새깁니다.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통영에 많았을 리가 있겠는지요. '처녀'를 경남 지역 말로 '처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처녀를 보고 '처니야'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그 소리가 백석 시인님에게 신기하게 여겨졌겠습니다.

 
백석 시인님은 통영에 오기 전에 고향이 통영인 아리따운 박경련 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랬기에 시인님은 처음 와보는 이 남쪽지방의 해안마을에 사는 처녀들이 자꾸 눈에 보이고 그이들의 삶에 눈길이 갔던 걸까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참 서럽고 애틋한 구절입니다. 미역줄기(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고 하네요. 그때 통영의 '천희들'이 말입니다.
 
미역줄기는 마르면 꼬깃꼬깃 비틀어집니다. 갯가에 뒹구는 딱딱한 굴껍질은 얼마나 과묵한 모습인지요. 그런 서러운 삶을 살아가는 바닷가 처녀들의 핼쑥한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사는 슬픈 삶이네요. 왜 그랬을까요?
 
그런 바닷가 '처녀'들의 삶에 대해 백석 시인님은 또 다른 '통영'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싶어한다는 곳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어장주(漁場主)'. 어장을 가지고 있으니 부자입니다.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라고 합니다. 가족을 위해 사랑을 가슴 깊이 눌러두어야 했네요. 그리하여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라고 하네요. 얼마나 애달픈지요.
 

"미역오리같이"-백석시'통영'중에서.
"미역오리같이"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3. 바닷가에서 조개가 우는 까닭은?


다시, 오늘 만나는 시 '통영'을 계속 읽습니다.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시인님은 통영에서 그런 '천희의 하나'를 만났다고 합니다. 삶이 너무 고단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외면하고 살아갈 것 같은 가여운 '천희' 말입니다. 장사꾼들이 먹고 자는 객줏집에서 만났다고 하니 그 집 딸이었을까요? 거기서 일하는 어여쁜 '천희'였을까요?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 마루처럼 바닥에 나무를 깐 방이네요. 생선이 흔한 동네이니 객줏집은 생선요리가 많았겠고요. 생선을 발라먹다가 흘린 생선가시들이 방구석에 굴러다닐 정도였겠고요. 그걸 발견하고 또 시에 등장시킨 백석 시인님의 낮고 섬세한 시선이 느껴지네요.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백석 시 '통영' 중에서

 

'조개', '울음', '소라방등', '김냄새', '비'. 백석 시인님의 청각과 시각과 후각에 포착된 사물들입니다. 이 낮고 작고 흔하고 사소한 사물들에서 우리는 시인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녁비가 내리고 마당에는 불그레한 소라방등(소라껍데기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박아 밝히는 불)이 커져있습니다. 깊이 모를 어떤 애상감이 물씬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통영에 내려온 시인님의 마음속에는 박경련 님 밖에 없겠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난한 '천희'의 통영입니다. 이 통영행 이듬해인 1936년 2월에 발표된 백석 시인님의 산문을 만납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1997년) 중 백석의 산문 '편지' 중에서

 

자신이 마음속에 둔 '천희'도 시린 사연을 가진 이였네요. 그 사랑스럽고도 애연한 '천희'가 온통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데 객줏집에서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를 만났네요. 그 순간 눌러두었던 그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마음이 소라방등처럼 불그레하게 켜졌을까요? 
 
그런데 왜 조개가 운다고 했을까요?
 
백석 시인님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힌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 중에서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운다고 하고요, '조개도 울을 저녁'이라고 하네요. 만물이 시인님의 마음을 향하고 있네요. 낯선 통영에 와서 울음과 설렘이 뒤섞여 흐르는 시인님의 마음요.

 

이렇게 사람을 애틋하게, 두근거리게 하는 시 '통영'입니다. 백석 시인님의 시 '통영'은 통영의 애상곡이네요.

 
어서 통영에 가고 싶네요. 백석 시인님 시화 앞에서 사진도 찍고요, 그 옆 대로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맛있는 충무김밥도 먹고요. 그때 '김냄새 나는 비'가 내리면 좋겠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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