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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진규 시 소한 무렵

by 빗방울이네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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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님의 시 ‘소한 무렵’을 만납니다. 일면식도 없는 직박구리와 문득 사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읽기


소한(小寒) 무렵

- 박진규(1963년~ , 부산)

꽁꽁 언 약수터

댓잎 서걱대는 소리 시리다

목 축이러 온 직박구리

그냥 간다

가지고 온 물을 반쯤 남겨 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 물을 먹다 포르르 날아간다

낮달을 새 물에 담아 주었다

그 다음날 ···

물 먹다 나를 바라보고 흠칫

날아가지는 않는다

대숲 속에서 다 보고 있었구나

짐짓 눈 감고 지나간다


- 「생명과문학」 2023년 겨울호 중에서


2. '낮달을 새 물에 담아 주었다'


꽁꽁 언 약수터 / 댓잎 서걱대는 소리 시리다 / 목 축이러 온 직박구리 / 그냥 간다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댓잎 서걱대는 소리마저 시리게 들릴 정도로 추웠던 어느 소한 무렵이었네요.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동지와 대한 사이의 소한 무렵은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입니다.

이 즈음에는 사람의 활동도 힘들어지지만 새들이나 길고양이 같은 짐승들이 곤란을 겪는 시기입니다. 목이 말라 약수터에 온 직박구리 한 마리가 얼어버린 약수터를 보고 그냥 간다고 합니다.
 
새들은 사람들이 약수를 뜨다가 흘린 물을 쪼아 먹곤 합니다. 그마저 얼어버려 마실 만한 물이 없는 상황이네요. 얼마나 물이 먹고 싶었을까요?

가지고 온 물을 반 남겨 두었다 / 나중에 와보니 그 물을 먹다 포르르 날아간다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시의 화자는 직박구리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었네요. 직박구리를 위해 자신이 마시던 물을 반쯤 남겨 약수터에 두었다고 합니다. 시의 화자는 산보길이었을까요? 다시 와보니 직박구리가 그 물을 쪼아 먹다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버리네요.  

낮달을 새 물에 담아 주었다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그냥 '새 물을 담아 주었다'가 아니라 '낮달을 새 물에 담아 주었다'라고 하네요. 이 구절이 이 시의 가장 높은 곳, 우듬지네요.
 
왜 '낮달을 새 물에 담아 주었다'라고 했을까요? 물컵에 하얀 낮달이 떴다는 말인데요, 물을 컵에 담아 주던 화자의 눈에 겨울하늘의 낮달이 들어왔다는 말이네요.
 
물을 컵에 따르고 난 뒤 화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네요. 푸른 하늘이 시리게 높고 멀리 있었겠습니다. 화자의 행위를 하늘이, 그리고 낮달이 보고 있다는 암시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박구리에게 물을 주는 행위에는 화자와 직박구리와 하늘고 낮달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네요. 그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일 텐데, 자연 속의 존재들이 함께 참여해 가꾸어가는 사랑이네요. 낮달의 등장으로 우리의 시야가 아주 높고 넓게 확장되는 느낌입니다.
 

'낮달을새물에'-박진규시'소한무렵'중에서.
"낮달을 새 물에"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3. '대숲 속에서 다 보고 있었구나'

 
그 다음날 ··· / 물 먹다 나를 바라보고 흠칫할 뿐 / 날아가지는 않는다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추운 겨울날, 직박구리에게 물을 주는 화자의 행위는 여러 날 동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직박구리는 물을 먹다 들키면 날아가버리곤 했다는 것도요.
 
그런데요, 어느 날 직박구리가 '날아가지는 않는다'라고 하네요. 시의 화자를 보고 한번 흠칫할 뿐이라고 하네요. 왜 사람을 보고도 직박구리는 도망가지 않았을까요?

대숲 속에서 다 보고 있었구나 / 나는 짐짓 눈 감고 지나간다

- 박진규 시 ‘소한 무렵’ 중에서


이 시의 두 번째 우듬지네요. 직박구리가 대숲에서 화자의 행위를 다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화자의 눈에는 어두운 대숲에 있는 직박구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직박구리는 화자의 행동을 모두 볼 수 있었겠네요.
 
이는 어떤 행위라도 누군가가 다 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네요. 하늘과 낮달이 다 보고 있듯이요. 자기만 아는 행위라고 여겨질지라도 사실은 많은 눈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요.
 
수차례 물을 가져와 컵에 남겨두는 화자를 며칠동안 지켜본 직박구리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겠습니다. 화자의 마음이 직박구리에게로 가더니, 직박구리의 마음이 화자에게로 건너왔네요. 그리하여 그 두 마음은 한마음이 되었네요. 그 열린 마음의 통로는 얼마나 환할까요?
 
그 환희를 마음 속으로 어루만지며 화자는 '짐짓 눈 감고 지나간다'라고 하네요. 직박구리가 마음 놓고 물을 먹을 수 있게 못 본 체한다고 하네요.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이종(異種) 간의 벽도 허물어버리네요. 얼마나 따뜻하고 신비로운지요?
 
그대에게도 이 겨울 내밀하게 소통하며 사귀는 직박구리가 있겠지요? 혹은 동박새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진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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