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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이육사 시 광야

by 빗방울이네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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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님의 시 '광야'를 만납니다. 읽고 나면, 참된 마음이 부르르 일어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육사 시 '광야' 읽기

 
광야(曠野)
 
- 이육사(1904~1944, 경북 안동)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氾)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시집」(이육사 지음, 범우, 2013년) 중에서

 

2.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이육사 시인님은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중국으로 송치된 뒤 감옥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시인님 나이 40세 때였네요.
 
이육사 시인님 순국 2년 뒤인 1946년 시인님의 동생 이원조 님과 벗들인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 시인님들이 유고시집 「陸史詩集」을 발간했습니다.
 
이 초판본 시집에는 모두 20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이 시집의 맨 앞에는 신석초 시인님 등 4명의 편집위원 명의로 된 '序'를 읽어봅니다.
  
한평생을 걸려 쓴 시로는 의외로 수효가 적음은
고인의 생활이 신산(辛酸)하였음을 이야기하고도 남는다···
서울 하숙방에서 이역야등(異域夜燈) 아래
이 시를 쓰면서 그가 모색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실생활의 고독에서 우러나온 것은
항시 무형(無形)한 동경(憧憬)이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 초판본 「陸史詩集」(이육사 지음, 서울출판사, 1948년)의 '序' 중에서

 
시의 수효가 의외로 적은 이유가 시인님의 세상 사는 일이 신산(辛酸)해서 그랬을 거라고 합니다. 경북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을 하면서 힘들고 고생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시인님은 하숙방의 흐릿한 등잔불 아래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벗들의 문장 중에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꽂히네요. 그 꿈은 어떤 노래였을까요?
 

"가난한 노래"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3.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시 '광야(曠野)'는 유고시집 「陸史詩集」의 20편의 시 중에서 19번째로 실린 시입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제목 '광야(曠野)'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을 말합니다. 
 
이 시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들렸으랴'입니다. '들리지 않았다'와 '들렸으리라'의 두 가지 해석이 맞섭니다.
 
'닭 우는 소리'는 새벽을 여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독서목욕'은 이 시의 분위기를 살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민족이 열린 이 땅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겠느냐'라고 새겨봅니다.
 
눈을 감고 시인님이 되어 시간적으로 아득한 옛날에, 공간적으로 아득한 광야에 우리 민족이 처음 열리던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텅 비고 아득하고 고요한 벌판에 닭 울음이 창공을 울립니다. 우리는 이처럼 신비롭고 웅장하며 숭고한 새벽의 기운 속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참아 이곳을 범(氾)하던 못하였으리라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산맥들이 야생동물처럼 바다를 향해 힘껏 내달린다는 표현이 역동적입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유장하게 달려온 백두대간, 거기서 힘껏 뻗어간 웅장한 산맥들의 힘찬 질주가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이 '광야'는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곳입니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광음(光陰)'은 빛과 그늘(낮과 밤), 즉 세월을 뜻합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수많은 세월('끊임없는 광음')이 흘러 우리 민족의 역사('큰 강물')가 도도(滔滔)하게 흐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쩐지 이다음에는 어떤 반전이 일어날 분위기이네요.
 
지금 눈 나리고 /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지금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입니다. 이 시가 쓰인 때는 일제강점기입니다. 겨울은 일제의 폭압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입니다.
 
이 구절을 음미하며 시인님의 아픔을 떠올려봅니다. 시인님은 항일투쟁으로 17번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힘겹고 외로운 싸움입니다. 그렇지만 이겨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네요. 어떻게 큰 강물로 달려온 민족인데 이대로 꺾일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집니다.
 
눈 속에서 피는 매화입니다. 매화향에서는 강인함과 외로움이 풍깁니다. 벽을 향해 무릎을 꿇었을까요? 시인님의 넓은 어깨에서 강인한 기개도 느껴지지만, 매서운 '겨울'을 헤쳐가야 한다는 고독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민족을 위한 자신의 노력이 비록 미미(微微)하고 충분치 않는 '가난한 노래'일지라도, 그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자신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 씨를 '뿌리겠다, 뿌려야만 한다'라고 합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시 '광야' 중에서

 
'천고(千古)'는 '아주 오랜 세월'을 말합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후세일 것입니다. 억압과 굴종을 타파해 줄 의로운 존재 말입니다. 
 
시인님은 기원합니다. 지금 자신이 뿌린 이 '가난한 노래의 씨'가 오랜 세월 뒤에 싹을 틔워 우렁찬 노래가 되어줄 것을요. 목놓아 부르는 환희의 노래가 되어줄 것을요.
 
그러므로 지금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부려야 한다고 합니다. 미미하지만 씨를 뿌리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시간에 자신이 해야 할 막중한 임무라고 합니다.
 
시 '광야'가 실린 초판본 시집  「陸史詩集」 맨 끝에 이육사 시인님(본명 이원록)의 동생 이원조 님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불치(不治)의 병이 거의 치경(治境)에 이르렀을 때
끝끝내 정섭(靜攝) 하지 않고 해외로 나간 것은
파탄(破綻)된 생활과 불울(怫鬱)한 심정을 붙일 곳이 없어
내가 그처럼 만류했음에도 나중에는 성을 내다시피 하고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걸음은 마침내 사인(死因)이 되고 만 것이다. 

- 초판본  「陸史詩集」 '跋文' 중에서 

 
이육사 시인님은 폐질환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불치의 병이 거의 나았다고 여겨졌을 때 요양을 더하지 않고 해외로 나갔다고 합니다. 동생의 간곡한 만류에 시인님은 화를 내다시피 하고 베이징으로 홀연히 떠났다고 합니다.

항일투쟁을 위한 국내 무기반입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걸음'이 '마침내 사인(死因)이 되고 만 것'이라고 합니다.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우리는 고개를 들어 부르르 참된 마음이 되어 시인님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라는 벗들의 문장을 떠올리면서요. 
 
이 웅장한 시를 읽고 나니 지금 겪고 있는 세상사 이런저런 소소한 어려움들이 먼 풍경처럼 느껴지네요. 이렇게 마음을 씻어주신 시인님, 감사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이육사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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