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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머루밤

by 빗방울이네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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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머루밤'을 만납니다. 시인님이 구축해 놓은 외로움 가득한 공간입니다.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외로움으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머루밤' 읽기

 
머루밤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불을 끈 방안에 횃대의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 것같이
 
개方位로 말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門을 연다 머룻빛 밤한울에
송이버슷의 내음새가 났다
 

※ 원문에는 마지막 3연 '연다'에서 '연'의 받침은 'ㄹㄴ'으로 표기되어 있음. 띄어쓰기는 일부 조정함.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국어사전에 없는 '머루밤'의 뜻은?

 
백석 시인님의 시 '머루밤'에서, '머루밤'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머루는 포도과의 열매인데요, 포도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머루알이 포도송이처럼 달려 있습니다.
 
'머루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있습니다. 눈동자가 머루알처럼 까만 눈을 말합니다.
 
머루알의 색깔은 흑자색, 즉 보랏빛이 나는 까만색입니다. 
 
시인님은 이 색깔을 떠올려 '머루밤'이라는, 그동안 없던 말을 만들어냈네요.
 
어두운 밤을 비유하는 단어로 '칠흑(漆黑)'이 떠오르네요. 칠흑 같은 밤, 즉 검은 옻칠 같이 어두운 밤이라는 말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고 했을 때, 밤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낯선 옻냄새까지 나는 것만 같네요. 새로 산, 옻칠이 된 밥상에서 나는 그런 냄새 말입니다. 
 
그런데 '머루밤'은 어떤가요? 
 
보랏빛이 스며있는 검은 색감과 향긋한 머루향이 함께 다가오는 것만 같네요.
 
이 멋진 '머루밤'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정보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지금 시 속의 계절은 머루가 익는 가을이겠고요, 지금 시인님이 있는 장소는 머루가 나는 시골이겠네요.
 
자, 이제 시인님이 혼자 있는 그 '머루밤'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불을 끈 방안에 횃대의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 것같이'
 
불을 끄고 방안에 있으면 처음에는 앞이 깜깜하다 점점 시각이 살아나서 방안의 사물들이 그 희미한 윤곽을 드러냅니다.
 
우리도 시인님처럼 불을 끄고 방안에 누워서 방 한구석에 놓인 횃대(옷걸이)를 쳐다봅니다.
 
그 옷걸이에 '하이얀 옷'이 걸려 있네요.  
 
어두우니 '하이얀 옷'만 눈에 희미하게 들어오네요.
 
이 '하이얀 옷'은 어떤 옷일까요? 누구의 옷일까요?
 
시인님의 옷, 시인님이 '세상'에 나갈 때 입는 옷인 것만 같습니다.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 것같이'
 
'멀리'는 어렴풋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의미로 새깁니다. 왜 추울 것 같을까요? 
 
이 구절의 전체적인 뉘앙스는 외로움이네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으니 쓸쓸함이 차오르면서 마음이 어슬어슬 추워지네요.
 
시인님은 이 '하이얀 옷'에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된 것일까요?
 
'개方位로 말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개방위(方位)'는 10시 방향을 말합니다.
 
24방위의 하나인 술방(戌方)데,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에서 이 술방(戌方)의 상징이 개여서 '개방위'라 한 것입니다.
 
시인님이 누운 어두운 방안에서 '말방울 소리'가 10시쯤의 방향에서 들려온다고 하네요.
 
이 밤중에 달구지를 끄는 말이 워낭을 딸랑거리며 지나가고 있나 봅니다.
 
깜깜하여 더 조용한 밤, 그 말방울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겠네요.
 
이 말방울 소리도 외로움입니다.
 
왜냐하면 첫 행에서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 것같이'가 두번째 행 '개방위로 말방울소리가 들려온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멀리 추울 것같이'가 '개방위로 말방울소리가'를 꾸며주는 모양새가 됩니다.
 
이처럼 횃대의 하이얀 옷도, 말방울 소리도 멀리 추울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시인님은 지금 얼마나 어슬어슬 춥고 외로운 심사이겠는지요.
 
머루처럼 까만 밤에, 불을 끈 방 안에서 혼자 말입니다.
 

"머룻빛 밤하늘" - 백석 시 '머루밤' 중에서.

 

 

 

3. 이 외로움이 저 외로움 씻어주는 '외로움 샤워'

 
'門을 연다 머룻빛 밤한울에 / 송이버슷의 내음새가 났다'
 
'門을 연다'에서 '연'자의 받침은 원본에서 'ㄴ'이 아니라 'ㄹ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ㄹㄴ' 받침은 시인님이 즐겨 쓰는 특별한 받침 글자입니다. 
 
'문을 연다(받침 'ㄹㄴ')'라는 표현에서는 문을 열고 있는 움직임과 그 동작이 막 정지한 상태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시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찾아 문을 열기까지의 움직임이 담긴 짧은 동영상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문을 연다 머룻빛 밤한울에'
 
이렇게 '문을 연다'와 '머룻빛 밤한울에'를 이어놓으니, 문을 열자마자 깜깜한 밤하늘이 순간적으로 확 다가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송이버슷의 내음새가 났다'
 
눈을 감고 우리도 시인님처럼 마음의 방문을 열어봅니다.
 
가을밤, 깜깜한 '머루밤'입니다.
 
사물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10시쯤의 방향에서 말방울소리가 들려오고요.
 
그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방문 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었습니다.
 
밖도 머루밤이고요, '송이버슷의 내음새가 났다'라고 하네요.
 
시각이 잠겨서 더 예민해진 후각이 송이버섯의 냄새를 감지했네요.
 
우린 이 ‘송이버슷의 내음새’에서 지금 시인님이 얼마나 외진 산골에 있는지 알고 말았습니다.
 
스마트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는 곳요.
 
그 귀하다는 송이버섯의 내음새를 속 깊이 들이쉬며 머루처럼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님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은 시 속에서 외롭다는 말을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외로움이 밀물처럼 차오르네요.
 
그런데 우리 모두 이렇게 외롭지 않은지요?
 
스마트폰이 있어도 텔레비전이 있어도요. 
 
이 외로움 가득한 시 '머루밤'을 읽으니 외로움도 서로 약이 되는지 우리의 외로움이 맑고 개운해진 느낌이랄까요?
 
시 속의 외로움이 시 밖의 외로움을 씻어주었달까요?
 
우리 이를 '외로움 샤워'라고 할까요?
 
말방울 소리를 울리며 시인님을 찾아가고 싶네요. 이 외로움으로 그 외로움 씻어주려고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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