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님의 시 '푸른 오월'을 만납니다. 오월의 싱그러운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주는 맑고 밝은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노천명 시 '푸른 오월(五月)' 읽기
푸른 오월(五月)
노천명(1911~1957년, 황해도 장연)
청자(靑磁) 빛 하늘이
육(六)모정(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女人)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正午)
계절(季節)의 여왕(女王) 오월(五月)의 푸른 여신(女神) 앞에
내가 웬일루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들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쿤
향수(香水) 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래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혼닢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五月)의 창공(蒼空)이여
나의 태양(太陽)이여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 노천명 시집 「창변(窓邊)」(노천명 지음, 문학사상사) 중에서
이 시는 위 책에 실린 원본에 있는 옛말 가운데 일부를 현대어로 '독서목욕'이 정리한 것입니다.
2. '계절의 여왕 오월'의 풍경 속으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의 시인 노천명 시인님의 시 '푸른 오월(五月)'를 만납니다.
시 '푸른 오월(五月)'은 1945년 발간된 시인님의 시집 「창변(窓邊)」에 실린 시입니다.
1945년 작품이니 시인님 30대 초반의 시네요.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오월의 시입니다.
밖에 나가 사물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오월의 시입니다.
'청자(靑磁) 빛 하늘이 /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 여인(女人)네 맵시 위에 /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正午)
계절(季節)의 여왕(女王) 오월(五月)의 푸른 여신(女神) 앞에 / 내가 웬일루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들 / 어찌하는 수 없어 /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30대 초반의 노천명 시인님은 오월의 어느 날, 이렇게 밖으로 나왔네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었을까요? 물방울무늬요.
청자빛은 푸른빛입니다.
'육모정'(6개의 기둥으로 여섯 모가 나게 지은 정자) 정자를 지나고 있네요.
그 꼭대기 위로 청자빛(푸른빛) 하늘이 펼쳐져 있고요.
시인님은 지금 시리도록 푸른 오월의 하늘을 보고 있네요.
눈이 부셔 깍지 낀 두 손으로 손 그늘을 만들어 실눈으로 보고 있었을까요?
'연못 창포잎'. 단오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그 창포입니다.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이렇게 겹쳐놓아 창포잎처럼 휘어진 여인네의 맵시가 한층 돋보이도록 했네요.
'첫여름'. 어떤 이는 '첫 번째 여름'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그보다 이 당시 '첫여름'은 여름의 초입, 여름의 시작을 표현하는 말이었네요.
시인님은 '첫여름'의 맛(정취)이 감미롭다고 합니다. 달콤하다고 합니다.
창포잎은 점점 짙은 초록으로 변하고 여인네 마음도 한껏 부풀어가는 시간이니 온몸 온마음 얼마나 사물거리는 시간이겠는지요.
'계절의 여왕, 오월'
우리는 이 유명한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오월에 쓰는 편지나 축사 같은 글 속에 말입니다.
그렇게 시인님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 '푸른 여신'이라고 칭해놓고 문득 자신을 돌아보네요.
'내가 웬일루 무색하구 외롭구나'
'무색하다'는 '겸연쩍고 부끄럽다' 또는 '본래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보잘것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찬란한 대상 앞에서는 시인님처럼 우리도 까닭 없이 위축되는 것만 같습니다.
저 찬란함의 대열에 나만 소외된 듯 외로워지고요.
'내가 웬일루 무색하구 외롭구나'
이 시가 처음 발표된 당시 원본 그대로의 표기입니다.
'웬일루 무색하구'라는 구절 좀 보셔요.
30대 초반 여류시인님 특유의 어리광이랄까요? 당혹감이랄까요?
이 흥미로운 입말, 음미할수록 정답고 정답네요.
외로워지면 시인님처럼 우리도 고향 생각이 나지 않겠는지요?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던 어린 시절 말입니다.
고향을 떠올리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鄕愁)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네요.
어쩔 수 없이 먼 데 하늘을 바라보는 수밖에요. 고향마을의 하늘, 먼 데 하늘 말입니다.
오월의 어느 날, 밖으로 나와 육모정 지붕 뒤로 펼쳐진 하늘에 머물렀던 시인님의 시선은 연못의 창포잎과 여인네의 맵시에 닿았다가 라일락 꽃 숲, 그리고는 먼 데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롱 테이크로 찍은 한 편의 동영상이네요.
싱그러운 오월의 풍경 속에 서성이는 시인님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가슴에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출렁거리는 시인님 말입니다.
3. 종달새처럼 솟구치게 하는 오월의 힘!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쿤 / 향수(香水) 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 청머래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 활나물 혼닢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 /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이제 시인님은 걷습니다. 오월의 풍경 속으로요.
외따른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기네요.
그다음 구절은 그 생각 속의 장면, 어린 시절 고향의 장면들일 것입니다.
'풀냄새가 물쿤'
'물큰'은 냄새 따위가 한꺼번에 확 풍기는 모양을 말합니다.
'물큰'보다 시인님의 입말인 '물쿤'에서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살아나는 것 같네요.
길섶을 돌아섰을 때 코를 훅하고 끼친 '풀냄새'였겠지요?
어떤 향수(香水) 보다 좋다고 하네요.
이런 풀 냄새를 우리, 오월의 향수라고 부를까요?
'나는 활나물 혼닢나물 적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
시인님은 '-' 표시 속에서 울먹이고 있는 것만 같네요.
'잃어버린 날'이 그리워서 말입니다.
산나물을 함께 캐던 옛 고향친구가 그리워서요.
슬픔에 잠긴 시인님은 슬픔을 털어버리려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라고요.
산으로 들로 다니며 봄나물을 캐던 소녀들이 불렀던 노래였겠지요?
그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찌 서러운 눈물이 나지 않겠는지요?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五月)의 창공(蒼空)이여 / 나의 태양(太陽)이여'
옛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에 외로움에 젖어있던 시인님에게 문득 고향의 종달새가 떠올랐네요.
보리밭 푸른 물결도요.
'종달새'. '노고지리' '종다리'라고도 합니다.
보리밭에 둥지를 지어놓고 둥지에서 하늘로 수직으로 솟구치는 성정이 있는 텃새입니다. 영역보호를 위해서요.
시인님 마음도 종달새 모양(처럼) 하늘 높이 솟구치고 싶다고 합니다.
찌이지크, 찌이지크, 쓰이, 쓰이, 유우, 유우 하고 우는 종달새는 얼마나 귀여운지요!
무슨 중요한 용무가 있는 듯, 저 하늘 끝 구름까지 가는 종달새는 얼마나 용감한지요!
이미 시인님은 한 마리 종달새가 되어 높이 높이 치솟아 오릅니다.
오월의 창공으로요, '나의 태양'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높이 솟게 하는 힘, 이것이 '계절의 여왕 오월'의 힘이겠지요?
시인님처럼 우리도 밖으로 나가보려고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을까요? 물방울무늬요.
하늘색 셔츠 하나만 입을까요? 셔츠 단추 다 풀고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노천명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동학농민혁명 (110) | 2024.05.10 |
---|---|
부산맛집 사직동 건강 담은 보리밥 (85) | 2024.05.09 |
김동환 시 웃은 죄 (123) | 2024.05.07 |
백석 시 정문촌 (127) | 2024.05.06 |
윤석중 동요 어린이날 노래 (137) | 2024.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