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시인님의 시 '웃은 죄'를 만납니다. 어여쁜 사람이 물을 긷고 있는 우물가로 달려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동환 시 '웃은 죄' 읽기
웃은 죄
김동환(1901~?, 함북 경성 출생)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김동환 시선」(방인석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인, 2013년) 중에서
이 시는 위 책에 실린 원본의 조사와 띄워쓰기, 그리고 행과 연의 구분은 그대로 두고 낱말 중 옛말만을 '독서목욕'이 현대어 표기에 맞추어 정리한 것입니다.
김동환 시인님(1901~?)은 함북 경성 출신으로 1924년 「금성」에 '정성을 손까락질하며'를 발표하며 등단, 시를 비롯 수필, 평론,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1925년 우리나라 신시(新詩) 역사상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습니다. 시집으로 「국경의 밤」 「승천하는 청춘」 「시가집」 「해당화」 등이, 수필집 「꽃피는 한반도」, 기행문 「나의 반도산하」 등이 있습니다.
2. 그 시골 우물가에서는 무슨 일이?
김동환 시인님의 시 '웃은 죄'는 1938년 「신세기」 3월호에 처음 발표됐습니다.
시인님 30대 후반의 시네요.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의 시고요, 시의 공간은 시골의 우물가입니다.
시에 '평양'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님의 고향 함경북도 경성의 어느 우물가로 보입니다.
옛날의 시골 우물가는 요즘의 아파트 커뮤니티센터라고 할까요? 혹은 아이 학교 근처 커피숍이라고 할까요?
부녀자들이 모여 '새실' 떠는 곳입니다.
그 당시 집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공간, 우물가입니다.
머리에 이고 온 양동이에 우물물도 길어 채우고요, 저녁 찬거리 채소도 다듬고요, 빨래도 하고요.
그래서 우물가에 모인 부녀자들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는 입이랄까요?
그리하여 우물가는요, 그 마을의 모든 소문이 태어나고 자라는 곳입니다.
1930년대 후반의 북한, 시골의 한 우물가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이 3개의 행은 어떤 낭자의 진술이네요.
그 우물가에서 어느 남정네에게 샘물을 떠준 처녀 말입니다.
그 잘 생긴 낯선 나그네는 길을 가다 우물가로 다가와, 하필 낭자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겠습니다.
- 낭자! 경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어딘지 좀 가르쳐줄 수 있겠소?
- (조신한 낭자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며) 네, 저기 보이는 산등성이를 넘으면 바로 경성이랍니다···.
- 아,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한 모금만 부탁해도 되겠소?
- (조롱박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웠을까요? 고개를 외로 꼬며) 네, 여기 있사옵니다.
- 캬아, 물맛이 참 달군요. 고맙소이다 낭자!
- (낭자, 말없이 웃는다) ···.
이것이 사건의 전말입니다.
이 낭자도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라고 항변하네요. 별 다른 일(?)이 없었다고요.
그렇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네요.
그런데요, 어떻게 꽃 같은 처녀 총각 사이에, 그것도 처음 만나 말을 섞은 처녀 총각 사이에, 그것도 마실 물을 주고받는 처녀 총각 사이에 별 다른 일이 없었을 수가 있었겠느냐, 이 말입니다.
아무리 고개를 외로 꼬았다고 하지만 물을 건네면서 처녀는 물 조롱박에 닿은 남정네의 믿음직한 입술을 보았을 것이고, 그 찬물 넘어가는 힘찬 목울대 율동도 보았을 테고, 먼길 오느라 땀 젖어 번들거리는 목덜미도 다 보았겠지요? 손가락 사이로요.
아무리 물만 얻어마신 총각이라고 하지만 고개를 외로 꼰 처녀의 복숭아 같은 뺨과 가냘프고 고운 섬섬옥수와 앵두 같은 입술 다 보았겠지요? 곁눈질로요.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말입니다. 우리 그 짧은 순간의 서사(敍事)를 다 알 수 있지 않겠는지요? 우리도 다 경험한 일이니까요.
우물가 아낙네들도 다 알겠지요. 그들도 다 경험한 일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물가의 촉새 같은 메신저들은 마구 신이 났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처녀의 강력한 항변에도 얼마나 많은 입방아를 찧어쌓았겠는지요?
-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어? 은밀한 눈짓을 받았어? 언제 또 만나자고 약조했지?
3. 처녀의 결정적인 실축, '웃은 죄밖에'
'평양성(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 난 모르오 / 웃은 죄밖에'
동네 아주머니 촉새 군단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처녀의 말은 믿지 않습니다.
- 니 말을 믿느니 내일 평양성에 해 안 뜬다는 말을 믿겠다!
이러면서 처녀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내일 평양성에 해 안 뜬다'는 말은 '내일 서쪽에서 해가 뜬다'라고 바꿔 읽으면 쉽겠네요.
그러니까 ‘지나가는 총각과 아무 일 없었다’는 처녀의 말에 '네 말을 믿느니 내일 평양성에 해 안 뜬다는 말을,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을 믿겠다'라면서 처녀의 염장을 질렀네요.
이렇게 처녀 총각의 연애 소문은 심심한 동네를 얼마나 달구어놓았겠는지요.
궁지에 몰린 처녀는 도리질을 합니다. 이렇게요.
'평양성(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촉새 군단의 한 일원이 '아무 일 없었다고? 흥, 그 말을 믿느니 평양성에 해가 안 뜬다는 말을 믿겠다'라고 하자 처녀가 한 대답입니다.
그런데요, 이 일을 어쩔까요?
바로 이 말을 하고 우물가를 떠났어야 할 처녀는 결정적인 실축(失蹴)을 하고 맙니다. 자살골 말입니다. 이렇게요.
'웃은 죄밖에'
'웃은 죄밖에'. 처녀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웃은 죄밖에' 없다고 합니다.
처녀는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기 위해 짜낸 말이겠지만 아뿔싸, 자신이 웃었다고 그만 자백해버리고 말았네요.
그 낯 모르는 남정네에게 웃었다고요. 남정네에게 웃었다는 것은 그 엄한 분위기에서는 보통 큰 사고가 아니었겠네요.
- 아니, 생전 처음 만난 남정네에게 네가 웃었다고? 맞네, 서로 통했네, 통했어! 너 그럴 줄 나 벌써 알았다니까!
그 뒤의 사정은 말해 무엇하겠는지요?
촉새 군단의 한시도 쉬지 않았을 입방아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뒤늦게 처녀는 아차! 싶었겠고요.
처녀는 나그네를 다시 만났을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 섬세한 시를 읽으니 어서 우물가로 달려가고 싶네요.
이런 아름다운 우물가 어디 있는지 혹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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