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시인님의 시 '편지'를 만납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이를 떠올려주는 시입니다. 시인님이 퍼올려주시는 따뜻한 사유의 목욕물을 저마다의 머리에 끼얹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남조 시 '편지' 읽기
편지
- 김남조(1927~2023, 경북 대구)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김남조 시전집」(편집위원 오세영 최동호 이숭원, 국학자료원, 2005년) 중에서
2. 그대는 이런 '그대'가 누구인지요?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 김남주 시 '편지' 중에서
그대에게 이 시 속의 '그대'는 누구인지요. 누가 떠오르는지요. 누가 떠올라 여전히 그대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요.
사랑하는 사람, 친구, 어머니, 아버지, 자식, 아기, 절대자, 선지자 ···
이 중에서 그 누구일지라도 이런 '그대'를 마음 깊이 품고 사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 김남조 시 '편지' 중에서
‘그대’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오히려 ‘그대’는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요.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사랑에 뒤따르는 그림자는 외로움이라고 하네요.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왜 외로움이 더 커지는 걸까요? 사랑하는 대상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나의 갈망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일까요? 사랑하는 대상은 나의 열정, 나의 불면의 밤들과는 상관없이 차가운 하늘만 보고 있기 때문일까요? 쫓아가도 쫓아가도 잡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사랑과 외로움이 동반해서 커지는 이 부조리의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사랑할수록 외로움의 우물이 깊어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네요.
이때의 울음은 성찰일 것입니다. 그때 흐르는 눈물은 마음속 딱딱한 응어리를 풀어주고 자신의 내면을 맑게 씻어주는 정화수일 것입니다.
3.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 나의 시작이다
- 김남조 시 '편지' 중에서
내가 가장 정직해졌을 때는 가장 사랑하는 '그대' 앞에 섰을 때입니다. '그대' 앞이라면 나는 저절로 무릎이 접혀 꿇어지고 맙니다. '그대'를 생각하기만 해도 내 마음의 빗장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동으로 열려버리지 않던가요?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이 구절도 참 좋네요.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요? 사랑하는 일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시도 잊지 못하고 떠오르는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이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는 일이겠지요.
'그대의 깊이'를 지나가는 순간마다 나는 얼마나 나를 스스로 비춰보았겠는지요? 그 거울에는 언제나 그렁그렁한 내가 서 있네요. 이렇게 '그대'는 나의 내면을 순간순간 가장 선명하게 비춰주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입니다. '그대'가 없을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의 정직한 내면을 이제 직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식과 과장, 거짓과 오만 같은 온갖 나쁜 감정들이 빠져나간, 오롯이 순수한 자아의 상태로 나를 리셋시켜 나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힘일까요?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은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김남조 시 '편지'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씁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영적인 타전(打電)입니다.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마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굴곡지고 아픈 시간이 지나 서로 진실로 진실로 깊이 사랑하게 되면 하나의 마음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대'는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입니다. 이미 '그대'는 나로 가득 채워진 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내가 '그대'로 가득 채워져 있듯이 말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남조 시인님의 시 '성주'를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