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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가즈랑집

by 빗방울이네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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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가즈랑집'을 만납니다. 백석 시인님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사슴」의 대표선수, 첫 시입니다. 시인님이 퍼올려주시는 따뜻한 시어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가즈랑집' 읽기

 
가즈랑집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매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山)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은 밤 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즘생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멫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엔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녯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달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 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山)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네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멫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어 하로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2. 백석 시인 첫 시집의 대표선수 첫 시는 '가즈랑집'

 
1936년 1월 백석 시인님은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냈습니다. 윤동주 시인님이 구하지 못해 빌려서 필사해 놓고 읽었다는 그 귀한 시집입니다. 나중에 이 시집이 시인님의 유일한 시집이 되었습니다.
 
백석 시인님은 첫 시집의 첫 시로 '가즈랑집'을 배치합니다. 첫 시집 첫 시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가즈랑집'은 시인님의 회심(會心)의 미소가 스며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시를 쓰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시를 쓸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 세상의 만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들의 따듯한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입니다!
 
시인님의 첫 시집 대표선수 '가즈랑집'은 이런 시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시입니다. 
 
이 낯설고 정다운, 이 '혁신적인' 시에, 기존의 시에 익숙한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나 봅니다. 시집 「사슴」이 나왔을 때 신문에 실린 반응입니다.
 
한 권의 시집을 그(백석)는 실로 한 개의 폭탄을 던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졌다.

- 조선일보에 실린 시집 「사슴」에 대한 김기림 시인의 서평(1936. 1.29) 중에서

 
백석 시인님은 자신의 시를 아무도 읽지 않아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의 고향 평북 방언을 그대로 활자로 옮겨 시속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시 '가즈랑집'을 대하면 매우 난해한 형상(겉모습)에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발 다가가면 희한하게도 어렵다고 느껴지던 방언이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던 언어처럼 어느새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어, 시 공간에 바로 내가,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들이 얼마나 가까이 따뜻하게 어우러져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발 더 가면 그 따뜻함에 푹 젖어 백석 시인님의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행복한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백석시가즈랑집중에서
백석 시 '가즈랑집' 중에서

 

 

 

3. '밑구멍에 털이 멫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가즈랑집'은 가즈랑이라는 곳에 있는 집입니다. 가즈랑은 평북 정주의, 백석 시인님 집과 가까운 거리의 백미산 가주령(가즈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백석 님이 이 가즈랑집에 자주 놀러 갔던 사연이 담긴 시가 '가즈랑집'입니다.
 
가즈랑집 주인은 할머니입니다. 세상의 할머니는 얼마나 다정한 분인지요. 내 말을 다 들어주고 언제나 내편인 분, 부모님께 혼나고 도망가서 안길 수 있는 분입니다.
 
시 '가즈랑집'은 들머리에서 이 집이 어떤 곳에 있는지를 알려주네요. 
 
사나운 짐승(승냥이)이 새끼를 치고 쇠망치(쇠메)를 든 도둑이 출몰하는 외진 산 고개 위입니다. 짐승들이 물어가니 닭이나 개 같은 짐승을 놓아먹일 수 없고요. '맷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이라는 대목에서 '쿡' 하고 웃음이 나네요.
 
그다음으로 가즈랑집 주인인 할머니는 어떤 분인지 알려주네요. 예순이 넘은 자식 없는 혼자 사는 분이고요, '중같이 정'한 분, 바로 할머니는 무당입니다.
 
이 무당 할머니가 '내가 날 때 죽은 누이가 날 때' 대감님께 탄생을 신고하고 무탈을 기원해 준 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소년 백석 님이 아프면 '신장님 달련'이라며 신장님이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다 크기 위해 그런 거라고 위로한다네요.
 
소년 백석 님은 심심할 때마다 그런 가즈랑집 할머니에게 놀러 갔네요. 봄날 산나물 캐러 갈 때 졸졸 따라다니고 맛있는 것도 얻어먹으며 놀았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들이 맛있다고 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사이겠네요.
 
어떤 맛난 음식을 먹었을까요?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 백석 시 '가즈랑집' 중에서

 
봄날 산나물 캐는 데 따라가서 여름에 날 물구지우림과 둥굴레우림과 가을에 날 도토리묵과 범벅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 소년 백석 님을 생각해 보셔요. 이때부터 식도락가 시인 자질이 다분했네요. 먹어본 적 없는 도토리범벅 이야기에 이렇게 침이 넘어가는 건 시인님의 마법이겠지요?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 백석 시 '가즈랑집' 중에서

 
이 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의 하나입니다. 광살구(잘 익어서 저절로 떨어지는 살구)를 주우려 살구나무 아래를 서성이다가 살구나무에서 우르르 광살구들이 무리 지어 한꺼번에 떨어졌네요. 이런 '살구벼락' 한번 맞아봤으면요. 두두둑 살구에 맞아 아프기도 하고 살구가 많아 좋기도 하고 또 이 광경이 스스로 우습기도 했나 봅니다. 
 
그다음이 참 걸작입니다.
 
밑구멍에 털이 멫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 백석 시 '가즈랑집' 중에서

 
하하하. 우는 사람을 달래거나 놀릴 때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멀리 평북 정주에서도 통하고 있었네요. 울다가 웃는 소년에게 할머니가 다가와 밑구멍에 털이 났는지, 얼마나 났는지 한번 보자고 놀리고 계시네요. 그 말에 허리춤을 부여잡고 다람쥐처럼 저기 달아나는 소년이 보이네요. 얼마나 정다운지요?
 
이렇게 정답고 정다운 시어들이 후미진 마음의 골짜기에 불을 켜 온통 맑고 환해지는 느낌이 드네요.
 
시 '가즈랑집', 첫 시집 대표선수로 내세울 만하지요? 이제 다시 한번 천천히 이 대표선수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머니가 보고 싶고 어린 내가 그리워 눈물 핑 돌아도 마음 개운해지겠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초동일'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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