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고 스미기

정현종 환합니다

by 빗방울이네 2023. 11. 17.
반응형

정현종 시인님의 시 '환합니다'를 만납니다. 시인님이 켜놓은 환하고 따뜻한 풍경으로 인해 우리 마음도 환하고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현종 시 '환합니다' 읽기

 
환합니다
 
- 정현종(1939년~ , 서울)
 
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천지가 배부릅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
내 마음도 저기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집 - 섬」(정현종 지음, 열림원, 2009년) 중에서

 

2. '감나무에 감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환합니다 / 감나무에 감이 /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 다 합해도 /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 정현종 시 '환합니다' 중에서

 
감나무에 발갛게 익은 감을 보았을 때, 이처럼 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시인이겠습니다. 그대도 시인님처럼 감나무의 바알간 감들이 환하다고 생각하시지요?
 
늦가을 감나무 가지마다 발갛게 익은 수많은 감들을 보면, 정말이지 수많은 알전구들이 저마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천지가 환합니다'. 왜 이렇게 천지가 환할까요? 생명이기 때문이겠지요? 그 속에 숨 쉬는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렇게 천지가 환한 건 '감나무의 전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환한 빛을 보고 얼른 새들이 날아와 감을 먹어달라는 감나무의 간절한 청인 것만 같습니다. 감을 먹고 멀리 날아가 똥을 눠 달라는 감나무의 당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무 위의 감들이 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 천지가 배부릅니다 /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

- 정현종 시 '환합니다' 중에서

 
그렇네요. 참으로 보기만 해도 배부르네요. 겨울이 와도 저렇게 따지 않고 놔두었으니, 허기진 새들도 오가며 홍시를 파먹고 눈 언저리가 환해졌겠습니다. 보는 우리도 눈앞이 환하고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요. 이 세상 편안한 포만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지난봄엔 하얀 감꽃들이 피었고, 그 자리에 아주 작고 푸른 풋감들이 맺혀 여름을 건너 가을 내내 자랐습니다. 피어보지도 맺어보지도 못한 낙화와 낙과의 시간. 남은 감들은 해와 달과 비와 바람 속의 희로애락의 시간을 거쳐 속이 점점 가득 차올랐겠습니다.
 
그런 감의 이력서를 천천히 읽어보니 감은 바로 우리 모두인 것만 같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푸르던 질풍노도 시절의 떫은맛이 가라앉고 서서히 익어 알맞게 달고 저렇게 환한 알전구가 되었겠지요?
 

정현종시환합니다중에서
정현종 시 '환합니다' 중에서.

 

 

3. '내 마음도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내 마음도 저기 / 감나무로 달려가 /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 정현종 시 '환합니다' 중에서

 
감이 환하고 천지가 환합니다. 그런 가운데 시인님도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환하게 환하게'요. 그리하여 오로지 환함만 존재할 뿐, 누가 시인님인지 누가 감인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인님은 자연과 합일이 된 것일까요? 시인님은 참으로  따뜻하고 환했겠습니다.
 
이 시를 읽는 우리도 시인님을 따라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 환함입니다. 시인님과 우리는 이 깊고 높은 시 속에서 하나로 환해지네요. 우리 모두 깊고 높아지네요. 무섭고 외로울 리 없습니다.
 
이렇게 시인님의 시는 가을 하늘의 감처럼 환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네요. 시에 대한 시인님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나는 시를 가리켜 '깃-언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허공과 같이 가볍게 하고 통풍을 잘 시키며 온통 새벽빛으로 물들이는 언어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그 시의 공간 속에서, 태아와도 같이, 맑은 피와 드높은 음식을 공급받는다.

- 「월간중앙」(2016.12.) 한기홍 선임기자의 정현종 인터뷰 '생명이 황홀함에 바쳐진 시학' 중에서

 
그랬군요. 시인님의 시어는 깃털 같아서 우리의 무거웠던 '몸과 마음을 허공과 같이 가볍게' 만들어주었네요. 그리하여 우리는 '태아와도 같이 맑은 피와 드높은 음식을 공급'받는군요.
 
시인님, 향기롭고 드높은 음식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현종 시인님의 시 '안부'를 만나 보세요.

 

정현종 시 안부

정현종 시인님의 시 '안부'를 만납니다. 과연 시인님이 궁금해하는 '안부'는 무엇일까요? 시인님이 퍼올려주신 따뜻한 사유의 우물물을 마음에 적시며 저마다의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

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

 

반응형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조 편지  (107) 2023.11.20
천상병 아기 욱진  (111) 2023.11.18
유치환 박쥐  (120) 2023.11.16
윤동주 소년  (121) 2023.11.15
안치환 친구 2  (117) 202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