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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목월 시 봄비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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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인님의 시 '봄비'를 맞습니다. 이 '봄비'는 우리에게 어떤 약이 될까요? 시인님이 내려주는 ‘봄비’를 흠뻑 맞으며 마음을 씻으며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목월 시 '봄비' 읽기

 
봄비
 
-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月谷嶺) 삼십리(三十里)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뒤에 더덕순
담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안에서
호박순 새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 「박목월 시 전집」(이남호 엮음·해설, 민음사) 중에서

 
이 '봄비'를 맞기 전에, 박목월 시인님(1916~1978)의 초기 시에 대한 이남호 문학평론가님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시인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면,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인상적이고 독특한 미학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독특한 미학의 공간이 우리의 영혼과 심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작용을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되,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청록집」과 「산도화」 속의 그 순도 놓은 미학적 공간이 없었다면, 현대 한국시 문학사는 크게 허전했을 것이다.

-  위 책의 작품 해설 '한 서정적 인간의 일상과 내면'(이남호 문학평론가) 중에서 

 

2. 호박순 새넌출처럼 펴났는지요?

 
박목월 시인님은 1946년 「죽순」에 처음 ‘봄비’를 발표했다가 이를 나중에 고쳐 썼습니다. 그리고 이를 1955년 발행된 첫 개인 시집인 「산도화」에 실었습니다. 25세에 등단한 그가 31세 때 쓴 작품이네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합동시집인 「청록집」이 발간된 해인데 시작 활동이 왕성했을 시기입니다.
 
시 '봄비'의 어디가 그대의 가슴을 적셨는지요? 빗방울이네는 4연에서, 시인님의 말대로 마음이 사르르 피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안에서 / 호박순 새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 박목월 시 '봄비' 중에서
 
특히 '호박순 새넌출이 사르르 펴난다'는 구절에서는 호박순 새넌출이 피어나는 소리가 사르르 들리는 듯하고 피어나는 그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냥 '줄기'가 아닌 '넌출'은 또 얼마나 운치 있는 멋진 우리말인지요? 넌출은 길게 뻗어나가 늘어진 식물의 줄기를 말합니다. 이 단어 속에 호박순 줄기가 춤을 추듯 뻗어나가는 역동성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피어난다'와 '펴난다'는 또 얼마나 다른 느낌인지요? '펴난다'는 구겨진 것이 바르게 펴져서 위로 뻗어가는 생생한 형상을 보여주네요.

이것이 박목월 시인님의 시가 구축해 놓은 '순도 높은 미학적 공간'(이남호 문학평론가)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봄비는 만물을 '펴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대도 호박순 새넌출처럼 좀 펴났는지요?
 

박목월시봄비중에서
박목월 시 '봄비' 중에서

 

 


 

3. 이런 봄비는 약인 것만 같습니다

 
일요일 오후 뒷산에 산보 갔다가 우산도 없이 봄비를 만났습니다. 산책자들이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간 조용한 산속에서 봄비는 저 혼자 내리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오는데 대숲에 봄비 내리는 소리가 빗방울이네의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고요. 나하고 이야기 좀 하고 가라고 하는 듯이요. 
 
댓잎에 내리는 봄비 소리는요, 자세히 들어보니 밥 뜸 드는 소리인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큰 가마솥에 밥 할 때, 밥솥을 지켜야 했습니다. 얘야, 밥솥이 들썩거리면 밥물이 넘치지 않게 바로 솥뚜껑을 열어야 한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댓잎에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빗방울이네는요, 그렇게 매번 밥솥지기가 되어 긴장감 속에 밥솥을 노려봅니다. 밥물이 넘쳐 솥 밖으로 흐르면 큰일이니까요. 수분이 다 흘러넘친 밥은 맛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성공적으로 솥뚜껑을 제때 열어서 밥물을 진정시키고 나면요, 잠시 후 밥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투두투두 투두투 두투두 ········ 이렇게 뜸 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잘 들리면 안심입니다. 엄마, 밥 다 됐다! 어린 빗방울이네는 임무를 완수한 장수처럼 의기양양하게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투두투두 투두투 두투두 ········ 그렇게 봄비가 댓잎 댓잎 댓잎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소리도 굵어지고 직박구리들이 짝지를 부르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노는 아이들 목소리도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 속에 어린 빗방울이네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밥물 조절에 성공하면 어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이러십니다. 뭐든 뜸이 잘 들어야한데이. 그땐 잘 몰랐던 어머니 말씀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댓잎에 내리는 봄비 소리, 집에 있는 짝지(풀잎)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뜸을 잘 들이기 위해?) 휴대폰에 3분 정도 녹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봄비를 맞으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천천히요. 봄비는 호박순 새 넌출도 사르르 펴나게 하니까요.

아, 그런데요, 골목 어귀에 풀잎이 나타났습니다. 우산 하나를 들고 말입니다. 뭐할라꼬 여기까지, 투두투두 투두투 두투두 ········ 주름졌던 마음이 사르르 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봄비는 정말 약인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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