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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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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봄밤에 쓰다'를 만납니다. 시인님은 어떻게 봄밤을 보내고 있을까요? 그 봄밤 속으로 함께 들어가 시인님 곁에서 원고 쓰는 작업도 거들고 찬 소주도 한 잔 하면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읽기


봄밤에 쓰다

- 황동규

나는 왜 그 유명했던 김종삼을 만나기 전
그에 대한 긴 해설을 썼고
한번도 못 만난 박정만이 죽은 후에
그의 선시집(選詩集)을 엮고 있는가,
이 좋은 봄밤에 안간힘 쓰며?
그들의 시가 좋았기 때문인가,
나보다 착한 자들이었기 때문인가,
38평짜리 내 아파트 대신
0평짜리 삶을 그들이 살았기 때문인가?
혹시 우리 셋 모두 술꾼이기 때문은?
펜을 멈출 때마다
찬 소주를 마신다, 1/10병이 될 때까지.
물끄러미 남은 술을 들여다본다.
내 언제 술의 양 재는 소심증을 버리고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답답하면 숨 쉬고 편해도 숨 쉬는,
그런 못된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황동규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중에서


황동규 시인님은 1938년 평안남도 숙천 출신으로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1961년 첫 시집 「어떤 개인날」을 비롯  「비가」 「태평가」 「열하일기」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 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사는 기쁨」 「겨울밤 0시 5분」 「연옥의 봄」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을 펴냈습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만해문학상 문학부문, 김달진문학상, 구상문학상, 호암예술상, 홍조근정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2. 삶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매력

 
시 '봄밤에 쓰다'에 나오는 시어 좀 보셔요. 특정인 이름들이 버젓이 등장하는가 하면, 술 마시며 원고 쓴다는 여과없는 진술, '38평짜리 아파트', '술꾼', '못된 자' 같은 구체어들이 망설임없이 줄지어 나옵니다. 이런 게 시에 나와도 되나?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요. 그런데요, 이런 진술들이 시인님의 실감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네요.
 
처음부터 낯선 풍경입니다. 시 속에 두 사람의 시인이 기명으로 등장하는데요, 이 과감한 진술이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김종삼 시인님(1921~1984)은 우리 시사에 보기 드문 미학주의자로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세계를 펼쳐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입니다. 또 박정만 시인님(1946~1988)은 '소월보다 깊은 한이, 만해보다 밀도 짙은 메타포가 있으며, 미당보다도 더 섬뜩한 광기의 시재(詩才)가 있다(김재홍)'는 평가를 받는 시인입니다.
 
한 마디로 두 시인은 우리 시사에 빛나는 별들입니다. 시의 화자는 그런 선배(김종삼)와 후배(박정만) 시인님의 시에 대한 해설평을 쓰거나 시선집을 엮었네요. 청탁에 의해서, 또는 자발적으로 썼을 텐데, 양자 모두 자신이 그 사람을, 그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이 좋은 봄밤에 안간힘 쓰며?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시의 화자는, 따르고 싶을 만큼 훌륭한 시의 길을 걸어갔고, 선하고 청빈한 삶을 살다 간 존경하는 선후배 시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좋은 봄밤에 안간힘 쓰며'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계산 없이 어떤 일이 마냥 좋아서 하고 싶어지는 일이 그대에게도 있지 않은지요?
 
그러다 시의 화자는 봄밤에 이 일을 하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이렇게 불쑥 꺼냅니다.
 
혹시 우리 셋 모두 술꾼이기 때문은? / 펜을 멈출 때마다 / 찬 소주를 마신다, 1/10병이 될 때까지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하하하. 이런 맛이 있어 황동규 시인님의 시가 좋습니다. 솔직하고 과감한 노출! 찬 소주를 마시며 시선집 엮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면서 속으로 공감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도 되네요(이러는 우리도 술꾼?). 그런데요, 시의 화자는 소주 한 병을 다 먹지 않고 1/10은 꼭 남겨야 하는 규칙을 스스로 정해놓았나 봅니다. 그리고 여기 좀 보셔요.
 
물끄러미 남은 술을 들여다본다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1/10이 벌써 돼버렸으면 어쩌지, 하면서 초록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좀 보셔요. '찐 공감' 가는 장면이네요. 그런데요, 이렇게 우리를 무장 해제시켜 놓고 시인은 모호함과 애매함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이렇게요.
 
내 언제 술의 양 재는 소심증을 버리고 /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 답답하면 숨 쉬고 편해도 숨 쉬는 / 그런 못된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황동규시봄밤에쓰다중에서
황동규 시 '봄밤에 쓰다' 중에서

 

 

 

3. 삶을 생생하게 작동시키는 감정에 대하여

 
빗방울이네 생각으로는 이 시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시의 화자는 술을 1/10까지만 먹어야지 하며 술의 양을 재는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는 듯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류의 소심함이 지탱해 주는 긴장감들이야말로 삶의 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선배와 후배 시인을 무작정 좋아해 '이 좋은 봄밤에 안간힘 쓰며',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에 자신을 맡겨, 하고 싶은 일을 몰두해서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작동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달관한 사람일수록 '감정'이 제거된 사람일 것입니다. 감정이 제거되면 자칫 '기계'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그런 사람을 '못된 자'라고 하네요.

'안 마셔도 허허롭고 마셔도 허허로운' 달관을 지향하지만, 이것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세상을 파릇파릇하게 질주하며 삶의 내면을 탐색하려는 시인님의 태도가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대는 어떤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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