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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by 빗방울이네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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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님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만납니다. 이 시는 어떤 좋은 힌트를 우리에게 건네줄까요? 시인님이 길어 올린 사유의 우물물로 마음을 씻으며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읽기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 섬」(열림원) 중에서


정현종 시인님은 1939년 서울 출신으로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첫 시집 「사물의 꿈」을 비롯,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정현종 시전집 1·2」 「광휘의 속삭임」 등을 냈습니다. 산문집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날아라 버스야」 등이, 번역서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파블로 네루다)와 「예이츠 시선」  「프로스트 시선」 등이 있습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부문) 등을 수상했습니다. 
 

2. 70세 노시인이 직접 그림을 그린 까닭은?


이 시가 실린 위 책은 2009년에 나왔는데, 책 앞에 실린 '시인의 말'에 소개된, 이 책이 나오게 된 사연이 흥미롭습니다. 그해 5월 열림원 민병일 부사장님이 정현종 시인님을 만나 '시인들 자신의 그림을 곁들인 시선집'을 기획하고 있다며 정현종 시인님의 책을 1호로 내고 싶다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 시인님은 초·중등학교 이후 그림을 그린 적이 없고,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거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설득당하고 맙니다.

그의 인품이 마음에 들었다. 어조가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고 또한 보기 드물게 겸손했다. 나는 내 느낌과 판단에 사람됨(바탕)이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못하며, 선한 사람한테는 꼼짝을 못 한다. 

- 위 책의 '시인의 말' 중에서
 

그래서 정현종 시인님은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게 되고, 이 책 속에 직접 그린 그림 12점을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정 시인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왼손 스케치를 비롯, 니체 , 파블로 네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와 파랑새 그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어떻든 이런 무모한 짓을 한 데 대해 독자는 용서하시기를. 나는 언제 철이 들 것인가

- 위 책의 '시인의 말' 중에서


이 과정을 곰곰이 생각하던 빗방울이네는 속에서 자꾸 부드러운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몽글거리며 피어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선한 사람한테는 꼼짝을 못 하는' 정현종 시인님의 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초·중등학교 이후 그림을 그려보지 않았다는 70세 노시인이 자신의 시선집에 넣을 그림을 그리려고(그것도 출판사의 이런저런 까다로운 주문에 맞추어!)  화방에서 그림 도구를 사고, 그해 여름 내내 도화지에 스케치를 하고 지우고 다시 스케치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다정하여 빗방울이네 마음이 따듯하였습니다.

그런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 어렵지만 한번 해보는 마음, 하면서 정성을 다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명편도 나오게 되었겠지요? 그 순전한 마음밭에서 말입니다. 

 

정현종시모든순간이다꽃봉오리인것을중에서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중에서

 

 


3. '우두커니'처럼 태양의 순간을 지나쳐 보낼 수 없어요!


오늘 만나는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앞쪽에 시인님은 붉은 해당화 한 송이를 그려놓고는 이렇게 써 두었습니다.  

'해당화, 그 속에 수많은 태양 - 2009년 여름 정현종'

- 위 책 중에서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해당화 꽃봉오리인데, 그 꽃봉오리마다 얼마나 많은 '태양'이 들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인연과 인연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그 속에 들어 있을까요? 그런데 그는 이렇게 가끔 후회한다고 합니다.

반벙어리처럼 / 귀머거리처럼 / 보내지는 않았는가 / 우두커니처럼 ······

-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에서

그런데요, 이 '우두커니' 좀 보셔요. '우두커니'라는 부사를 명사로 떡 하니 세워두었네요. 이런 정 시인님의 발랄함이 이 시를 저 높은 무한 공간으로 끌어올려줍니다. 앞이 보이는 일상어가 나열된 듯한 이 시는 '우두커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정현종 시인만의 이 같은 특별한 수사법은 우리가 '독서목욕'에서 읽었던 정 시인님의 '비스듬히'라는 시에서도 나왔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 정현종 시 '비스듬히' 중에서


'우두커니'와 '비스듬히'는 '우두컨이'와 '비스듬이'로도 읽히겠네요. 그래서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붙인 것처럼 부사를 명사화한 시인님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나른할 뻔했던 시의 분위기가 생생해졌습니다.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에서


이 시의 화자는 이처럼 '모든 순간이'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것처럼 진술하지만, 이 말은 물론 우리를 향한 전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두커니'처럼 태양의 이 순간을 그냥 지나쳐 보낼 수 없어요!

무언가 마음속 깊은 우물에서 차가운 샘물 같은 좋은 힘이 퐁퐁 생겨나는 것 같지 않은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현종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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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현종 시인님의 시 '비스듬히'를 읽으려 합니다. 이 시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든 일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마법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어떤 숨은 뜻이 있을까요? 이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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