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님의 시 '풀잎 단장'을 만나봅니다. 풀잎을 통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풀잎 단장(斷章)' 읽기
풀잎 단장(斷章)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무너진 성(城)터 아랜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나
아 우리들 태초(太初)의 생명(生命)의 아름다운 분신(分身)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조지훈 시선」(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중에서.
2. 첫 개인시집의 제목의 된 시 '풀잎 단장'
조지훈 시인님은 1946년 박목월 박두진 시인님과의 3인 공동시집 「청록집」을 낸 이후 1952년 시집 「풀잎 단장」을 냅니다.
오늘 만나는 시 '풀잎 단장'은 이렇게 시인님이 낸 첫 개인시집의 이름이 되었네요. 그만큼 이 시 '풀잎 단장'이 조지훈 시인님에게 소중한 시라는 의미이겠습니다.
제목 '풀잎 단장(斷章)'의 '단장(斷章)'은 '토막을 지어 몇 줄씩의 산문체로 적은 글' '가벼운 피아노 소곡'의 뜻입니다. 이로 미루어 제목 '풀잎 단장'은 '풀잎에 대한 작은 생각'의 의미로 새길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생각이 작을 수가 있겠는지요? 시인님의 겸손이 느껴지는 제목이네요.
일상의 곳곳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풀잎에 대해 시인님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무너진 성(城)터 아랜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풀잎에 대한 생각을 말하기 전에 이처럼 '성터'와 '바위'를 먼저 보여주네요.
왜 그랬을까요? 사물의 무상(無常)함을 말하기 위해서네요.
아무리 견고한 성(城)도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너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일지라도 오랜 세월 차가운 눈바람에 깎여 닳아진다고 하네요.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우리는 삶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 높은 언덕에 오르고 싶습니다.
앞이 벽으로 막힌 듯 깜깜할 때 언덕에 올라 탁 트인, 아득히 먼 풍경을 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城)일지라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큰 바위일지라도 깎여지게 마련이라고 느껴질 때 언덕에 오르고 싶습니다.
그 높은 언덕에 홀로 서서 구름처럼 무상하게 흘러가고, 성(城)이나 바위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며, 무너지지 않고 깎여지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조찰히'라는 단어가 눈에 띄네요. '조찰(澡察)하다'는 가톨릭 용어로 '죄를 씻고 닦다'의 뜻입니다. 다른 한자어로 '조찰(照察)하다'는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비추어 보아 잘잘못을 살피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조찰히'는 '맑고 깨끗히'의 의미로 새겨봅니다.
삶의 무상함을 느끼며 마음 둘 바를 모르던 시인님은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이렇게 풀잎을 만났네요.
그 풀잎은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이라 합니다. 얼마나 오래 풀잎을 바라보았으면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일 텐데요,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이 마치 스스로를 맑고 깨끗이 씻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네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만나고 무심히 보는 풀잎입니다. 하찮은 풀잎 하나를 마주하는 시인님의 마음이 참 곱고도 깊네요.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나'
풀잎을 골똘히 바라보던 시인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풀잎처럼 축소되고 풀잎에 동화되어 마침내 풀잎이 되었나 봅니다.
시인님은 이렇게 풀잎이 되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시인님은 자신도 바람이 흔들리는 풀잎 같은 작은 존재라고 생각했을까요?
자신도 삶에서 이런저런 '실오리 같은'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풀잎 같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바람결에 스스로를 '조찰히', 맑고 깨끗하게 씻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3. 인간도 풀잎도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
'아 우리들 태초(太初)의 생명(生命)의 아름다운 분신(分身)으로 여기 태어나'
'아 우리들'. 시인님은 여기서 풀잎과 자신을 묶어, 이 시를 읽는 우리까지 엮어 '우리들'이라고 호명했네요.
그것도 '아'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면서요. 이것은 풀잎을 바라보던 시인님에게 어떤 깨달음이 왔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작고 연약한 풀잎이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풀잎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요.
풀잎은 '성(城)터'나 '바위'나 '구름'처럼 결코 허물어지거나 깎여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생명'이라는 생각요.
우리가 미미하다 생각하는 풀잎처럼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도 얼마나 작은 존재일지요?
'생명(生命)의 아름다운 분신(分身)'. 이렇게 인간도 풀잎도 하나의 아름다운 생명이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태초(太初)의 생명(生命)'을 나눠가진 존재 말입니다.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풀잎과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꿇었겠지요? 시인님은 그렇게 풀잎과 얼굴을 마주 대었네요.
그러고는 나직히 웃으며 얘기한다고 합니다. 풀잎과 말입니다. 참으로 다정한 시인님이네요.
풀잎과 '나'는 똑같은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이라는 시인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무릎을 꿇고만 싶어지네요. 마음속의 풀잎 앞에서요.
'고달픈 얼굴'.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명의 고달픈 여정입니다. 풀잎과 나는 예의 그 '고달픈 얼굴'을 서로 마주대고 있네요.
'한 줄기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나 일상의 크고 작은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번뇌하는 나는 이렇게 '나직히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따뜻한 동지였네요.
풀잎과 나, 이렇게 우리는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함께 동행하고 있었네요.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은 그냥 작고 연약한 존재만은 아니었네요.
그렇게 작고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풀잎은 '태초의 생명'을 나눠가진 아름다운 우주적 존재,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간직한 '한 떨기 영혼'이었네요.
미미하고 유한한 우리 모두 풀잎 같은 존재였네요.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서 저마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묵묵히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한 떨기 영혼'이었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우리의 영혼이 무한한 공중으로 '그윽히 피어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님도 '한 떨기 영혼이여'라며 영혼을 호명하며 시를 마무리지었네요. 생명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이 느껴집니다.
그 경외감으로 우리는 한 떨기 작은 풀잎에 대하여, 그 풀잎을 둘러싼 자연에 대하여, 생명의 무한성과 존재의 유한성에 대하여, 그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작은 풀잎 하나가 우리의 시야를 우주로 넓혀주었네요.
이제 풀잎을 만나면 인사해야겠어요.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라고요. 우주의 운행에 동참하고 있는 친구를 대하듯 마주 보며 웃으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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