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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조지훈 시 병에게

by 빗방울이네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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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님의 시 '병(病)에게'를 만납니다. 병을 통해 지난 삶과 현재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병(病)에게' 읽기

 

병(病)에게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조지훈 시선」(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중에서

 

2. 병이 찾아오는 까닭은?

 

조지훈 시인님의 시 '병(病)에게'는 1968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48세 때입니다.

 

시인님이 20대에 쓴 시들이 '승무(僧舞)' '고풍의상(古風衣裳)' '완화삼(玩花衫)' 같은 주옥같은 시입니다.

 

50대에 이르러 시인님은 '병(病)에게'라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오래 시달리던 일손'. 이렇게 일에 휩싸여 몰입할 때는 아플 겨를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아플 겨를도 없이 바쁜 시간, 그러나 그 시간 속에 '병의 씨앗'은 커가고 있었겠지요. 몸을 돌보지 않는 불규칙한 식사와 지나친 음주, 부족한 수면과 운동. 이들은 그 병의 자양분이었겠지요. 

 

그래서 그 바쁜 시간이 끝나고 신체와 정신의 긴장이 다 풀어졌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병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시인님에게는 잘 낫지 않고 반복되는 지병(持病)이 있었나 봅니다. 

 

시인님은 그 지병을 '오랜 친구'라고 하네요. 그런데 한동안 그 '오랜 친구'를 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에 조심하지 않고 방심했습니다. 과욕과 무절제의 시간이었네요.

 

이 구절을 읽고 있으니 아래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다시 병이 걸리기 전의 상태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 ···.

이런 결단이 없이는 병을 치유했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일단 회복되고 나면 본래의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다시 과식과 과로, 과음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병도 되돌아온다.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고미숙 지음, 그린비, 2011년)

 

시인님도 그렇게 그 '오랜 친구'가 찾아오고서야 '그동안을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 한 구석도 찔리네요.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병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삼가며 생(生)의 의미와 가치를 곱씹게 됩니다.

 

병의 가장 큰 원인은 반야(지혜)의 결핍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네요.

 

반야는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를 알 수 있는 힘입니다.

 

지금 나의 행위가 내 몸에 어떤 해를 가져올지를 아는 지혜가 없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에 이끌리게 되고 그 행위들이 누적되어 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이렇게 나를 찾아온 병을 통해 나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내가 병을 통해서 보이네요.

 

'성실하게 성실하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채근하고 독촉하며 살고 있는지!

 

앞서가려고, 아니 뒤처지지 않으려고, 아니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치열한 레이스를 달리고 있는지!

 

"나의-오랜-친구"-조지훈-시-'병에게'-중에서.
"나의 오랜 친구" - 조지훈 시 '병에게' 중에서.

 

 

 

3. '나의 정다운 벗, 공경하는 친구'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시인님은 지금 병에게 항복 선언을 하려는 걸까요? 나약한 모습, 체념한 모습을 보일수록 병은 더 불같이 일어나겠지요?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병은 반복됩니다. 다 나았다고 자만하여 무절제와 과욕을 부리면 다시 찾아옵니다. 다시 찾아오는 그 병은 예전에 사귀었던 병이네요. 

 

그래서 시인님은 병을 '나의 정다운 벗'이라고 하네요. 나를 비추어보고 삶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는 병은 시인님의 '공경하는 친구'라고 합니다. 

 

시인님은 '왜 하필 나에게 왔느냐'라고 자신에게 찾아온 병을 원망하고 그에게서 도망가려고만 한 적도 있었네요. 그럴 때면 병은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마치 병이 항복이라도 받아내려는 듯이 시인님을 시달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님이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야 병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경도(傾倒)'는 온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거나 열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병을 사모하거나 열중한다는 말은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병의 원인을 찾고 병을 달래고 다스리는 것을 말하겠지요? 그러면 병이 떠나간다고 하네요. 

 

'잘 가게 이 친구 /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이 구절에서는 병을 대하는 시인님의 여유와 관조적인 마음이 느껴지네요. 병은 시인님에게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전령사인 것만 같습니다.

 

그런 시인님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아래 문장을 공유합니다.

 

병은 저 먼 곳에서 우연히, 실수로 들이닥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한 메시지를 들고 찾아오는 전령사라는 것을.

▷위의 같은 책 「동의보감 -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중에서

 

병은 우연히 들이닥치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메시지를 들고 오는 전령사라고 하네요.

 

오랫동안 나의 편향된 삶의 행위가 뭉쳐져 병이 되었고, 그렇게 생긴 병은 나의 삶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병은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는 것일까요? 

 

그러나 시인님에게 다시 찾아온 병은 이겨내지 못할 만큼 너무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이 시를 발표(1968. 1)한 4개월 후쯤인 5월 17일 새벽, 시인님은 기관지 확장으로 영면(永眠)했습니다. 애통하게도 48세의 짧은 생이었습니다. 병을 통해 끊임없이 생사(生死)를 성찰한 시인님의 마지막 길, 조금은 가벼웠겠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조지훈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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