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고 스미기

주요한 시 불놀이

by 빗방울이네 2024. 7. 11.
반응형

주요한 시인님의 시 '불놀이'를 만나봅니다. 어두운 시간, 방황과 좌절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청춘의 고뇌가 담긴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주요한 시 '불놀이' 읽기

 

불놀이

 

주요한(1900~1979, 평양 출생)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 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 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 물 우에 내어 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 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 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사월(四月) 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이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 -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여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우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젖개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大同江)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靑年)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오오 다만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한국 대표 시선 100인 선집 「불놀이」(주요한 지음, 미래사, 1996년 7쇄) 중에서

 

2.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 서정시다운 최초의 서정시  

 

주요한 시인님의 '불놀이'는 1919년 1월 「창조」에 처음 발표된 시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근대시의 본격적인 장을 연 시로, 한국 현대시사(詩史)에서 서정시다운 최초의 서정시로 꼽힙니다.

 

이전의 생경한 한문투를 벗어나 순수한 우리말을 구사했다는 점, 이전의 계몽적이고 설교적 입장을 배제하고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자유롭게 토로했다는 점이 '불놀이'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모두 5개의 연으로 구성된, 무려 1,224자(200자 원고지 8장)에 이르는 긴 산문시입니다.

 

시 '불놀이'가 쓰인 1919년은 시인님 20세 때이네요. 일제강점기입니다. 과연 어떤 시일까요? 시 속의 주요 장면을 따라가 봅니다.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부처님 탄신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네요. '물밀어가는' 인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 소리가 흥겹고 활기찹니다. 그렇지만 시의 화자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하네요. 흥겨운 군중 속의 고독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네요.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대동강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놀이 풍경입니다. '매화포'를 쏘는 불놀이네요. 매화포는 종이로 만든 딱총의 하나로 불꽃 튀는 모양이 떨어지는 매화 같아서 매화포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 '시뻘건 불덩이'를 보면서 시의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고독의 원인이 '가신 님 생각'이었네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라고 하네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라고 절규하고 있네요.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속에 ···'

 

이렇게 자포자기하여 삶을 버렸으면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이겠는지요?

 

그 순간, 매화포가 터졌습니다.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 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 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퉁, 탕' 하며 하늘을 수놓는 불티를 보면서 화자는 정신이 펄떡 들었다고 합니다. 엉기는 연기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시의 화자는 좀 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어졌네요. 1연에서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속에'하는 자포자기의 마음이었는데, 이 2연에서는 이제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네요. 그 뜻밖의 생각으로 가슴 두근거린다고 합니다.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3연에서 시의 화자는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워 강물 위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주위에는 사람들의 토론과 웃음소리, 기생의 노랫소리, 장고소리가 이어지고 있네요. 그 속에서 '까닭 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자신은 '죽어가는 촛불' 같다고 합니다. 사람들 속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노래와 술로도 달랠 수 없는 화자의 고독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배젓개소리'는 노 젓는 소리겠지요? 그 찌걱거리는 소리가 화자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느껴졌네요. 그 소리에 가슴이 눌려 화자는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네요.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 배가 오른다'

 

4연에서 환상의 눈에 비친 강물이 웃고 있다고 합니다. 이 웃음은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라고 합니다. 이 진술은 화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강물의 웃음은 바로 화자의 웃음이겠네요. 

 

'배가 오른다'. 그런 화자의 눈에 배가 올라온다고 하네요. 화자는 이 배를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라고 합니다. 이 진술도 화자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어 있겠네요. 3연에서 자신을 '죽어가는 촛불' 같다고 했던 화자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떤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네요. 

"오늘을-놓치지-말라"-주요한-시-'불놀이'-중에서.
"오늘을 놓치지 말라" - 주요한 시 '불놀이' 중에서.

 

 

 

3.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陵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大同江)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

 

능라도는 평양의 대동강에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섬입니다. 거기까지 배를 저어라고, 마지막 5연에서 화자는 스스로에게 명령합니다.

 

'너의 애인'. 여기서 너는 단지 화자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독자인 우리도 포함되겠지요? 일제강점기이니 우리 민족을 호명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능라도까지 배를 저어간다는 것은 잃어버린 주권(主權)을 찾으려는 몸부림일 것입니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이 구절을 시가 처음 발표됐을 때의 원문으로 만나봅니다.

 

'기림자 업시는 「발금」도 이슬 수 업는 거슬 -'

▷주요한 시집 「아름다운 새벽」(한국현대시 원본전집 1924년판, 문학사상사)에 실린 시 '불놀이' 중에서.

 

이렇게 「발금」에 따옴표인 낫표를 둘렀네요. 이 「밝음」은 빛을 되찾는 것, 바로 '광복(光復)'을 말하겠지요? 지금은 그림자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 암흑의 시간이 지나면  「밝음」이 온다는 말이네요. 이 「밝음」의 시간을 위해 밝음의 그림자 같은 슬픔을 견뎌야 한다는 말로 다가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만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이렇게요.

 

'오오 다만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이 구절은 문득 라틴어 문장 'carpe diem'을 떠올리게 하네요. 'seize the day'의 뜻, 즉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라'라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하루를 되는 대로 허투루 흘려보내버리지 말라는 말이네요. 

 

비록 비애와 절망의 시간일지라도 고통과 슬픔에 함몰되어 '오늘을 놓치지 말라'는, 화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것만 같습니다. 1연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의 봄'을 위해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뜨거운 다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겠지요?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20세의 주요한 시인님은 마지막 구절에 스스로를 불사르겠다는 맹세를 걸어놓았네요. 정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다짐입니다.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방황과 좌절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젊은 시인님의 고뇌가 깊이 다가오는 구절이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주요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주요한 시 샘물이 혼자서

주요한 시인님의 시 '샘물이 혼자서'를 만납니다. 외로운 삶의 길일지라도 춤추며 웃으며 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주요한 시 '샘물이 혼자

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

반응형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논어 첫 문장  (95) 2024.07.16
조지훈 시 풀잎 단장  (95) 2024.07.15
정태춘 박은옥 노래 봉숭아  (91) 2024.07.10
김소월 시 엄마야 누나야  (98) 2024.07.09
김상옥 시조 봉선화  (105) 202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