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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현종 시 한 꽃송이

by 빗방울이네 2023.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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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님의 시 '한 꽃송이'를 만납니다. 시인님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만난 시입니다. 시인님들은 항상 시를 골똘히 생각하며 살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현종 시 '한 꽃송이' 읽기

 
한 꽃송이
 
- 정현종(1939~ , 서울)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詩想에 잠기셔서 ···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족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
 

-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집 - 섬」(정현종 지음, 열림원, 2009년) 중에서

 

2. 시인님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까닭은?

 
복도에서 /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詩想에 잠기셔서 ··· /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 또 생각에 잠긴다

- 정현종 시 '한 꽃송이' 중에서

 
시인님은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본 뒤 줄곧 관능적인 생각에 잠겨 있네요. 그런 시인님의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동료가 무슨 시상(詩想)에 잠겨 그리 골똘하시냐는 듯이 '詩想에 잠기셔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료의 목소리조차 관능적인 '근육질'로 들릴 정도로 시인님은 '골똘히(!)' 생각하고 계셨네요. 이런 에로스적인 상상을 시로 가볍게 승화시킨 시인님의 이 거침없는 하이킥 좀 보셔요.
 
하, 족집게로구나! / 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

- 정현종 시 '한 꽃송이' 중에서

 
그런데 이 천연덕스러운 시인님이 생각해 보니 '詩想에 잠기셔서··'라고 한 동료가 '족집게'라고 합니다. 딱 알아맞혔다는 거네요. 왜 그럴까요?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는 '우리의 고향 저 원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걸어다니는 窓'이 아니겠느냐고 하네요. 그 창을 통해 꿈틀거리는 원초적 생명력을 감지했기 때문이겠지요? 원시의 고향에서 '풀무질해 키우는' 그 '기운의 소용돌이'가 생명을 낳고 시인에게 시를 잉태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잉태된 생명의 시가 바로 '한 꽃송이'네요.
 
시인님은 무얼 생각해도 결국 그것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네요. 그 동료분 정말 '족집게' 맞네요. 
 

"시상에잠기셔서"-정현종시'한꽃송이'중에서
"시상(詩想)에 잠기셔서" - 정현종 시 '한 꽃송이' 중에서.

 

 

3. 시인님이 무척 수척해진 까닭은?

 
정현종 시인님의 시 '한 꽃송이'를 읽다가 문득 생각난 시가 당나라 이백 시인님의 시입니다.
 
제목은 '戱贈杜甫(희증두보)'.
 
우리말로 옮기면, '두보에게 장난스레 주다'라는 뜻입니다.
 
한번 감상해보시죠.
 
飯顆山頭逢杜甫(반과 산두 봉두보) 반과산 머리에서 두보를 만나니
頭戴笠子日卓午(두대 입자 일탁오) 머리에 쓴 갓그림자 정오를 가리키네
借問別來太瘦生(차문 별래 태수생) 한번 물어보오, 헤어진 뒤 무척이나 수척한데
總爲從前作詩苦(총위 종전 작시고) 이 모두 그동안 시 짓기에 고심해서인지요?
 
이백 시인님(701~762)은 두보 시인님(712~770)보다 열 한살이나 많은 형님입니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두 사람이 만났다는 증거로 읽히기도 합니다. 제목의 '줄 증(贈)'은 아주 가까이 있는 이에게 줄 때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백 시인님의 시작(詩作) 스타일은 일필휘지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붓이 휘날리게 둡니다. 두보 시인님은 그 반대입니다. 한 글자라도 독자를 놀라게 할 수 있는 멋진 시어를 얻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는 스타일입니다.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도 썼던 정다운 두 사람의 성정은 반대이군요.
 
그런 두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를 보셔요.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두보 시인님은 많이 야위었나 봅니다(太瘦生; 무척 수척한 서생/書生). 이를 보고 형님뻘인 이백 시인님이 이렇게 말하는데요, 제목 '두보에게 장난스레 주다'를 생각하면 이런 느낌이네요. 애정이 담긴 톤으로요.
 
우리 두보 동생, 시 짓느라 그 좋던 얼굴에 살이 속 빠졌네! 무슨 영화를 누리려 시를 그리 고심해서 짓누! 
 
그런데 이백 시인님의 이런 농담에 대한 두보 시인님의 반응은 이 시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혹시, 두보 시인님도 그때 정현종 시인님처럼 그런 생각에 잠겨있었을까요?
 
정현종 시인님의 시 '한 꽃송이'와 이백 시인님의 '戱贈杜甫(희증두보)', 두 시의 얼개가 서로 닮아있어 함께 감상해 보았습니다.
 
두보 시인님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그동안 시 짓기에 너무 고심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놀리고 시 한 수 건진 이백 시인님.
 
이쁜 여자 다리 골똘히 생각하다 시 짓기에 몰두한다는 오해받다 시 한 수 건진 정현종 시인님.
 
이러구려 고래로 시 짓기, 삶 짓기에 세상 시인님들 다들 수고 많으시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정현종 시인님의 시 '환합니다'를 만나 보세요.

 

정현종 환합니다

정현종 시인님의 시 '환합니다'를 만납니다. 시인님이 켜놓은 환하고 따뜻한 풍경으로 인해 우리 마음도 환하고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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