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시인님의 시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을 만납니다. 이 시는 자꾸 슬퍼지는 노래입니다. 부르다 보면 슬픔에 흥건히 젖어들지만 슬픔은 아픔을 씻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하 시인님이 만들어준 슬프고 뜨거운 욕조에서 독서목욕으로 마음을 씻어보십시다.
1. 이제하 시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읽기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 이제하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을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제하 노래 모음」(이제하 지음, 나무생각) 중에서
이제하 시인님은 소설가, 화가, 평론가,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활약해온 '전방위 예술가'로 불리는 분입니다. 이제하 시인님은 1937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홍익대 조소과와 서양화과에서 수학했고, 1957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고, 「신태양」과 「한국일보」에 소설로 등단했습니다.
저서로는 소설집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용」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이, 장편소설 「열망」 「소녀 유자」 등이,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영화 칼럼집 「이제하의 시네마 천국」 등이, CD 「이제하 노래 모음」 등이 있습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편운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조영남 '모란 동백' = 이제하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조영남 가수님이 부른 '모란 동백'이 바로 이제하 시인님이 만들고 부른 그 노래입니다. 이제하 시인님은 1998년 시집 「빈 들판」을 냈는데 그 시집의 부록으로 자신이 만들고 노래한 가요를 담은 CD 한 장을 독자들에게 선물했습니다.(아, 시집 부록이 시인의 노래!)
이 CD에 실려 있는 노래가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입니다. 이제하 시인님이 기타를 치며 부른 이 노래를, 조영남 가수님이 '모란 동백'으로 제목을 바꿔 다시 부른 것입니다.
이제하 시인님은 이 노래의 멜로디를 먼저 만들고 멜로디를 위해 새로 시(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원래의 제목이 왜 이랬을까요? 이제하 시인님은 자신의 그림 산문집 「모란, 동백」에서, 모란의 시인 김영랑 님과 가곡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 님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이란 가곡을 매우 좋아해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하 시인님은 처음 어떻게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을까요? 1985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그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제하 시인님이 그 영화 주제가인 '빈 들판'을 만든 것이 계기였습니다. 이를 두고 그는 앞에 소개한 자신의 산문집에서 '순전히 아마추어가 장난 삼아 흥얼거린 즉흥곡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3. 백 마디 말보다 지혜로운 작은 멜로디 한 자락
그러나 그의 노래에는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제하 시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중에서
노래의 이 부분에서, 부르는 이는 한없이 고달프고 한없이 외로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 나무 그늘에, 어느 모랫벌에, 그것도 변방의 그런 곳에서, 외로이, 고요히 잠든다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 해도 그대가 나를 잠깐 동안만이라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면 된다고 하네요. 거참.
이제하 시인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노래들에 대해 소개하면서 '노래의 효용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스트레스 때문에 되든 안 되든 가끔 노래를 불러 본다. 원고가 막히고, 싼 원고료에 울화통이 치밀고, 산다는 일이 지랄 같게만 여겨지고 이도저도 지겨워 미친 듯한 기분이라도 들 때면 가만 앉아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중략) 온갖 소외감이 노래 한 자락으로 능히 뚫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백 마디 말의 지혜보다 작은 멜로디 한 자락이 더욱 효과 있고 지혜롭다는 것은 귀 가진 사람이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진실이다.
- 이제하 그림 산문집 「모란, 동백」 중에서
자, 이제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의 사람 애간장 다 녹이는 그 가락을 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제하 시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중에서
어떤지요? 그리움과 외로움이 섞이면 이렇게 자유롭게 새처럼 날아 아득한 점으로 사라지고 싶어지는 것인지요.
이제하 시인님의 말처럼 '백 마디 말의 지혜보다 작은 멜로디 한 자락이' 가슴에 맺힌 것을 풀어줄 때도 있지요? 이제 큰 욕심 없이, 큰 두려움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겠지요?
글 읽고 마음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그대에게 무욕의 자유로움을 줄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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