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님의 시 '봄밤'입니다. '봄밤'은 조용한 줄 알았는데, 만물이 처처에서 약동하고 있네요. 10줄의 짧은 시 속에서 고량주 냄새도 나고 비 냄새도 납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람 냄새도 납니다. '봄밤'에 풍덩 빠져 독서목욕을 하면서 겨우내 굳은 마음 부드럽게 풀어봅시다.
1. 황동규 시 '봄밤' 읽기
봄밤
- 황동규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를 조금 몰아내려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
하늘에 달무리가 선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비릿한 비 냄새.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냄새 맡기 분주하다.
형광등 불빛이 슬쩍 어두워진다.
화초들 모두 식물 그만두고
훌쩍 동물로 뛰어들려는 찰나!
- 황동규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중에서
이 시집 맨 앞에 시인님이 쓴 '자서(自序)'가 있습니다. 이 자서는 그의 시에 다가가는 징검돌입니다.
한 번쯤 서문은 취해서 써야 하리라. 글에 취해서, 아니면 사람에 취해서. 사물에 취해서, 그것도 아니면 커피에 취해서. 술에 취해서, 그것마저 아니라면 삶 자체에 취해서. 책상 위에서 느릿느릿 그러나 자기 몸에 맞는 동작으로 기어가는 벌레를 뭉개려고 원고지 한 장을 구겨 들었다가 언뜻 손을 멈춘다. 1991년 1월 황동규
- 황동규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자서(自序) 중에서
2. 우리를 끌어당기는 첫행의 매력
시 '봄밤'은 황동규 시인님의 시집 「몰운대행」 의 첫 시로 실려있습니다. 시집의 첫 시는 시인의 각별한 애정이 담긴 시로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시집이 1991년에 나왔으니, 시 '봄밤'은 1938년생인 황동규 시인님이 50대 초반에 쓴 작품입니다. 나이 50은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입니다. 그러므로 시 '봄밤'은 50년 동안 발효된 삶의 내공, 그리고 20세에 등단한 황동규 시인님의 시력 30년 내공이 더해진 시입니다. 과연 어떤 시일까요?
황동규 시인님은 '낯설게 하기'에 탁월한 시인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그의 시 첫행은 아주 낯설게 시작됩니다. 매우 독창적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을 깬 엉뚱한 진술, 참신한 발상, 솔직한 고백 같은 낯섦 때문에 우리는 '어, 이게 뭐지?' 하면서 시 속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첫 행을 봅시다.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를 조금 몰아내려
- 황동규 시 '봄밤' 중에서
시의 화자는 고량주를 마셨네요. 그 독한 술을 말입니다. 50도나 됩니다. 그것도 혼자 마셨네요. 그것도 몰래 마셨네요. 이런 진술로 미루어보아 시의 화자는 집에서 술 때문에 꽤나 걱정을 듣는 쪽인 것같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자식들의 눈총을 피해 거실에서 술을 몇 잔 하셨네요. 고량주는 독주니까 주변의 눈을 피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봄밤이니까요. 봄밤이니 어쩌겠는지요. 그렇게 춘정(春情)을 못 이기고 몰래 독주를 마신, 이 분 많이 얼큰해졌네요. 이렇게 시인의 일상의 한 단면을 가감없이 노출하며 술의 종류까지 언급하며 '낯설게 하기'로 시는 시작됩니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 비릿한 비 냄새
- 황동규 시 '봄밤' 중에서
시의 화자는 아직 오지 않은 비릿한 비 냄새를 맡았네요. 비 오기 직전의 기온과 습도는 사람의 후각을 예민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이런 생명현상은 사람이나 식물들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하네요. 일상에서 늘 그들과 소통하는듯, 화초들의 입장을 다 알고 있는, 낮고 따뜻한 이 시인님 좀 보셔요.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 냄새 맡기 분주하다
- 황동규 시 '봄밤' 중에서
겨울 동안 움츠리고 있던 식물들, 비가 올 것같은 습한 봄밤에 이렇게 약동합니다. 그 순간, 오래된 형광등이 마침 어두워졌네요. 이렇게 조도까지 적당하게 낮아졌네요. 참을 수 없는 이 간질거림, 어쩌겠는지요. 봄밤인데요.
3. 봄밤인데 어쩌겠습니까, 참말로요
화초들 모두 식물 그만두고 / 훌쩍 동물로 뛰어들려는 찰나!
- 황동규 시 '봄밤' 중에서
이 구절에도 시인의 심상이 담겨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많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 '찰나' 이후, 그날 봄밤에 이 시의 화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아무것도 묻지 맙시다.
황동규 시인님! 이 빗방울이네에게도 아직 3분의 1쯤 남은 50도짜리 고량주가 냉장고 옆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봄밤은 그 녀석을 식구 모르게 안주 모르게 혼자 만나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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