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시 '행복'을 만납니다. 첫구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유명한 시입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소중한 풍경을 만나게 될까요? 시인님이 건네주시는 행복의 우물물에 마음을 담가 씻으며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청마 유치환 시 '행복' 읽기
행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시선」(배호남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중에서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 청마 유치환 시인님(1908~1967)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1930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시인님은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한 이후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 「보병과 더불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 모두 14권의 시집과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 서울시문화상,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60세의 일기로 영면했습니다.
2.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이유는?
시의 첫 구절은 신이 내려주신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솟대 같은 시귀(詩句)입니다. 시 '행복'의 첫 구절, 아래의 이 문장 말입니다.
―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유치환 시 '행복' 중에서
이 구절로 인해 시 '행복'은 수많은 연인들의 징검돌 같은 시가 되어 서로를 애틋하게 당겨주었습니다. 세상의 연애사에 자주 인용되어 온 이 구절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유치환 시인님이 직접 밝힌 시 '행복' 탄생 이야기를 읽어보셔요(아래).
사랑함은 사랑을 받는 일보다 행복하다는 이 얼마 안 된 것 같으나
그러나 한량없이 지복(至福)한 복음에 이르기까지에는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겠습니까?
- 「자작시 해설 - 구름에 그린다」(유치환 지음, 신흥출판사, 1959) 중에서
시 '행복'의 첫 구절, 이 한 문장에 숱한 통곡과 몸부림이 있었다고 하네요. 시인님의 수많은 이별을 말하네요. 그런 고통 후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깨달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복음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이 시구는 인간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신의 말씀 같은 기쁜 소식(福音)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시인님은 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했을까요? 시인님, 그 까닭은 무엇인지요?
왜냐하면 사랑을 받는다는 일은 내가 소유됨이요,
내가 사랑함은 곧 내가 소유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다는 사실은 곧 다른 하나의 나를 더 설정한다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지없이 허무한 목숨에 있어서 나를 하나 더 설정하여 가질 수 있는 가능은 얼마나 큰 구원의 길이겠습니까?
내가 아낌없이 보내는 사랑에 하나의 목숨이 지극한 신뢰와 환희를 입고 목숨을 누릴 수 있다는 일은
그대로 준 것만이 아니라 내게로 말할 수 없는 환희와 흡족을 같아 보내는 은혜도 찾을 수 있는 일입니다.
- 「자작시 해설 - 구름에 그린다」(유치환 지음, 신흥출판사, 1959) 중에서
시인님의 호흡을 느낄 수 있게 그대에게 소개한 이 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소유하는 일이고, 소유하는 일은 나를 하나 더 설정하여 가질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은 큰 구원의 길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일방적 '소유'보다는 '또 다른 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내 사랑에 응답하면 서로는 동심일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겠네요. 내가 하나 더 생기는 일은 참으로 멋진 일이네요. 일찍이 이런 생각은 못해 보았네요. 그러니 우리는 무조건 먼저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3. 청마의 여성편력에 담긴 사연은?
잠깐만요, 앞에서 우리는 이 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 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엄청난(?) 고백이 들어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겠습니까?
- 「자작시 해설 - 구름에 그린다」(유치환 지음, 신흥출판사, 1959) 중에서
숱한 사랑과 이별 속에서 통곡과 몸부림을 겪었다 하시니, 이 빗방울이네, 참으로 어리둥절합니다. 시인님에겐 얼마나 많은 '연인'이 있었던 걸까요?
청마의 이 같은 여성편력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생의 갈망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휴머니즘과 실존 그리고 허무의 의지 - 유치환」(오세영 지음, 건국대학교출판부) 중에서
그랬군요. 위 책에 따르면, 청마의 연인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시조시인 이영도 님이었습니다. 청마는 이영도 님에게 무려 2,000통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그것도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 말입니다.
말하면 청마는 마치 연애라는 것을 처음해 본 사춘기의 소년처럼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던 것이며 ···
- 「휴머니즘과 실존 그리고 허무의 의지 - 유치환」(오세영 지음, 건국대학교출판부) 중에서
그럼 그렇지요. 청마의 편지 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또 사람의 세상사는 이치를 톺아보는 일이었겠네요.
시 '행복'을 읽으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그대는 사랑하는 쪽인지요, 주로 사랑을 받는 쪽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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